22.12.10
22.12.10 빌린 책 : 올드걸의 시집, 니체와 음악
지난주에 빌린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를 한 번도 못 펼쳐봤다. <클래식 음악사>를 지나치게 파고든 탓에 다른 책을 읽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다 읽지 못한 책은 그냥 반납했을 텐데, 그냥 놔주기 싫은 책이라 도서관보다 카페에 먼저 들렀다. 카페에서 홀라당 읽어버리고 반납해야지. 지나치게 가벼운 다짐이었다.
아주아주 진해서 카카오 향이 나는 아이스 아메키라노를 입에 머금고 첫 페이지를 열었다. “부서지고 있는 것은 파괴될 수 없다.” 과연 첫 문장부터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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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노트를 끝까지 읽고 나서, 오전의 다짐과는 다르게 오늘은 이 책을 반납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 노트가 시작되는 지점에 책갈피를 걸어놓고 책을 덮었다. 가볍게 빌렸을 뿐인 책 한 권을,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읽게 될 것이라는 예감. 김겨울의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는 총 4개의 노트(장)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첫 번째인 ‘운명’ 노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자서적 소설인 <운명> (임레 케르테스 저)으로 시작한다.
<운명>으로 운명 말하기. 책을 많이 읽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재치가 아닐까 감탄하며 페이지를 넘긴다. 괜히 찔려서 미리 하는 말이지만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4부작, 당연히 읽은 적이 없다.
<운명>에는 삶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두 명의 인물로서 해설되는데, 하나는 운명을 필연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안나마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운명을 우연적인 결과물로서 받아들이는 것(죄르지)이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두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완전히 대비되는 것이다. 나는 <운명>을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자 김겨울 씨의 입장을 좀 더 진하게 맛보았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타고나기를 우연의 세계의 시민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법칙과 필연을 믿지 않는다고 말이다. 덧붙여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이야기도 적어두었는데, 우연의 세계에서 완전한 해방감을 느낀다는 대목에서는 감탄했다. 내 입장은 둘째 치고, 한 번도 운명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 첫 번째 노트를 읽은 다음에 돌진한 장소가 ‘운명’이라니, 내가 왜 이 책을 오래 읽어야 한다고 했는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 역시 무신론자이고 ‘자유 의지’ 세계관에 의탁해서 살고 있다. 그러나 필연을 대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조금 다르다. 나는 때때로 정해진 운명과 그것을 관장하는 세 여신에 대해 생각하곤 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많은 일들. 그것들이 이미 절대신에 의해 관장되는 일련의 흐름이었다고 한다면, 내 자유의지는 그 운명이라는 흐름 안에서 그 어떤 의미조차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대목에서 니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서문에 언급했듯 김겨울에게 <운명>의 일부가 삶이 되었다고 한다면, 내게는 니체가 그렇다. 덕후로서 그의 사상을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어쨌든 지금 이 대목에서는 아모르파티-현시점 국내에서 이 문장은 지나치게 흥겨운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필연, 그러니까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운명론은 필연은 존재하되 좌표 안의 점(포인트)으로 존재하고, 그 점들을 어떻게 이어갈지는 우연, 더 정확히는 나의 자유의지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는 운명에 밀려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 동시에 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 또한 존재한다. (가히 회색분자 같은 결론이지만 뭘 어쩌겠나. 내가 그렇다. 많은 문제에서 나는 ‘반반이’로 통하고, 회사에서 누군가는 나를 ‘그레이존’이라고 부른다.)
제법 바보 같은 결론을 내면서도 나는 무척 흥분한 상태다.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할 만한 기회가 달리 있었을까? 책의 서문에, 저자는 “남이 쓴 글이 나의 삶 어디에 자리를 잡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이 책이다”라고 했다. 남이 쓴 글로 자신이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쓴 글도 누군가의 삶에 찾아갔으면 한다는 바람도 함께 적었다. 아마도 그렇게 된 것 같다.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는 가볍지 않다. 가볍게 읽고자 한다면 <독서의 기쁨> 쪽을 더 추천한다. 운명과 고독과 시간과 상상을 다루는 책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냐마는, 하여간 내 기대치보다 훨씬 묵직했다. (내게는 반가운 반전이다.)
일전에 올바른 서평 쓰는 법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저자는 독자에게 엄중한 태도로 서평에 대해서 설명하고 규칙을 나열했었다. 그런데 그 책 보다 이 쪽이 여덟 배는 더 무겁다. 그리고 스물네 배쯤 독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나는 4개의 노트 중 첫 번째 노트를 막 끝낸 참인 것이다. 한 챕터만 읽고 말이 너무 많았다 싶지만, 그만큼 나를 ‘생각하게’ 하는 독서가 오랜만인 탓이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도서관에 들러 오랜만에 니체를 찾아야지 다짐한다. <운명>이 있다면 다시 빌려야지, 하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