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드라마 | 아내의 유혹
2008년만큼 내게 가혹했던 시기가 또 있었을까? 내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을 꼽자면 그해 11월이다. 수능을 처참하게 망하고, 진심으로 '죽을' 날만 꼽던 나를 살렸던 것은 누군가의 따스한 위로도 무엇도 아닌, 당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아내의 유혹>이었다.
수능을 마친 후, 한참을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런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나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드라마 OST, 차수경의 '용서 못해'였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만 해"라는 가사가 들려오는데, '너'를 수능이라고 생각하면서 들었더니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서러움과 좌절감이 마치 노래와 함께 울려 퍼지는 듯했다.
시간이 흘러 수능 성적표가 나오던 날, 나는 진심으로 절망했다. 이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언어영역이 5등급이었다. 원래도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5등급은 수능에서 처음 받아본 등급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수능 첫 시간인 언어영역에서 이렇게 죽을 썼으니 다른 영역도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진 꼴이었다. 처참했다.
성적표를 봐도 봐도 등급은 바뀌지 않았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죽을까?
그때 나는 열아홉이었다. 수능 망해서 좋은 대학교 못 가면 그 것으로 인생이 망한다고 생각했던 열아홉.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꽉 막힌 생각을 했을까 싶지만, 그땐 그랬다. 수능 망해도 인생은 계속되고, 역전할 기회가 온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해 겨울, 진지하게 죽음을 고민했다. 하지만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게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까. 방법을 고민하는데,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계속 생각하니까 머리가 아팠다. 아픈 머리를 식히는 덴 생각 없이 어떤 것에 몰두하는 게 딱이다. 그래서 그때 내가 택한 방법은 텔레비전을 트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드라마가 나를 살렸다. 그게 바로- 앞서 언급했던 <아내의 유혹>이다.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내의 유혹>은 엄청난 작품이다.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끊을 수가 없었다.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주인공 구은재(장서희)는 절친과 남편에게 배신당한 뒤 민소희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서라면 외국어부터 고급 스포츠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하는데, 그런 모습이 나를 흥분하게 했다. 나도 그녀처럼 "할 거예요. 해보겠습니다. 해볼게요"라면서 뭐든지 해내고 싶었다. 당시의 나는 무기력에 짓눌려 무엇 하나 제대로 할 힘이 없었지만, 드라마 속 구은재의 활약을 지켜보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다.
나도 구은재처럼 모든 걸 해내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현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지만, 드라마를 보는 동안만큼은 마치 내가 구은재가 된 것마냥 악역들과 맞서 싸웠다. 그녀의 복수가 하나씩 성공할 때마다 쾌감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녀의 복수를 이뤄낸 것처럼. 급기야 그녀의 복수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해졌고, 그 때문에 죽을 수 없었다. 죽고 싶긴 한데, <아내의 유혹> 다음 편은 궁금하니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드라마 시작 시간만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를, 한 달을 버텼다. 긴 시간이 흘러 드라마가 끝이 났을 때에야, 나는 깨달았다. 다음 편이 궁금해서 그토록 죽지 못하고 버텼던 나날들 속에서, 어느새 내 마음속 상처는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구은재의 복수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내 고통의 시간도 흘려보냈다는 것을.
<아내의 유혹>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었다. 내게는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후시딘이자 마데카솔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내 삶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지금의 내 삶에서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