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친구 | 반올림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중학교 시절의 일이다. 친구 연지(가명)가 나에게 운동화 끈을 묶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친구의 운동화 끈을 리본 모양으로 묶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중학생이나 됐으면서 운동화 끈을 못 묶는다고? 그런데 이걸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고? 나라면 절대 못할 텐데.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이런 부탁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텐데, 연지는 당당했다.
거리낌 없이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는 연지가 부러웠다. 운동화 끈을 못 묶는 게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니, 나에게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나였다면 숨기고 싶었을 결점이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연지는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대답을 들으면 오히려 더 부러워질까 봐 겁이 났다. 그때의 나는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했고, 조금이라도 결점이 드러나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며 지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연지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친구 옥림이를 만났다. 옥림이는 당당함에 특유의 ‘똘끼’까지 갖춘 친구였다. 성적이 나쁘면 보통 숨기기 마련인 시험 성적표를 오히려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더니, 그 사진에 “난 공부를 못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옥림이는 그 사진을 동아리 지원서에 넣어 사진 동아리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아는 유명인이 되었다. 성적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당당하게 공개한 그녀의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연지와 옥림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연지는 현재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으로 멋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나에게 운동화 끈을 묶어 달라고 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마 그녀는 그때 그 일을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이 그녀의 성공을 예고한 시작점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용기가 모든 변화의 첫걸음이었을 테니까.
다음으로 옥림이,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는 없다. 사실, 옥림이는 오래전에 종영한 KBS 2TV <반올림> 속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 멈춰버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옥림이의 근황을 알 수 없다.
옥림이가 실존 인물이라고 상상해보자면, 지금쯤 그녀는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10대 시절 망한 성적표를 당당하게 공개하며 “나는 공부를 못한다”고 외친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남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멋지게 살고 있지 않을까.
며칠 전,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이끌어 다시 <반올림>을 보게 되었는데, 그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옥림이가 망한 성적표를 공개하기 전에 했던 말이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를 정말로 구박하고 미워한 사람은 엄마도 아니고 나였어. 난 내가 늘 부끄러웠어. 날 사랑한 적 없어. 이제 날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야.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옥림이의 말은 그때와 지금의 나를 동시에 꾸짖고 있었다. 나는 학창 시절에도, 지금도 여전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 결점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옥림이의 말처럼 “나를 구박하고 미워하고 부끄러워한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를 사랑하는 일은 아직도 어렵다. 연지나 옥림이처럼 자신의 결점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질투가 나기도 한다. 왜 나는 저렇게 하지 못할까 생각하다 보면 조바심이 들 때도 있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돼 행동을 멈추게 되고, 내 부족함에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내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미워하고 구박하는 일을 그만두려 한다. 단점이 있으면 그만큼의 장점도 있는 게 인간이니까. 나는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게 느리고 운동신경이 부족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심과 공감능력이 탁월하다는 장점이 있으니까.
그렇게 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으려 한다. 내 장점과 단점까지 모두. 이 글은 그런 내 노력의 시작점이다.
작은 변화들이 쌓여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날,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나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이 머지않았음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