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포텐을 탈출하라!
아! 로포텐 이야기
노르웨이 북서부에 자리한 ‘로포텐 제도’는 북극권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는 ‘로르부(Rorbuer)'라는 어부들의 임시숙소 겸 창고로 쓰던 곳을 개조해서 만든 리조트가 있다.
이 빨간 집을 보고서 끌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며칠 밤을 자지 못할 만큼 마음을 태웠다. "태풍이 휘몰아쳐도 좋아." "눈보라를 맞아도 좋아." "그곳 바닷가 로르부(Rorbuer)에서 하루 밤만 이라도 자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그렇게 노래 부르다시피 하다가 마침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행은 준비과정에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는데 가장 난제는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출발하기 얼마 전에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서 폭탄테러(2016.3.22.)가 있었다. 그 사건은 유럽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었고 타국 사람들에게는 유럽여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확산되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해봐야 되나'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럴 때마다 포기해야 하나; 언제까지 이런 예기 불안감 때문에 하려던 일을 못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그것이 진짜인지, 아님 익숙한 생존본능에서 야기된 가짜 불안인지; 한 번은 제대로 마주쳐봐야 되겠다. 그렇게 결심하고서 장벽을 넘어보기로 했다. 무모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감정 너머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노르웨이 최대 주간지 알러스는 1970년대 후반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레이네'를 선정했다.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이 마을은 노르웨이 북부 로포텐(Lofoten) 군도의 Moskenesøya 섬에 있다. 해안선 곳곳에 빨간색과 흰색 어부의 오두막이 있고 레이네 피요르드 (Reinefjorden)에서 솟아 나오는 화강암 봉우리가 주변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위키피디아>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개인적으로 가장 열망했던 로포텐에 가는 날이 되었다. 보되에서 배를 타고 가는데 날씨도 좋았고 배도 순항하여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리조트는 'Eliassen Rorbuer'이고, 숙소 앞에는 든든한 바위산이 있었다. 어부들의 숙소로 사용한 로르 부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멋스러웠다. 방 2개, 거실, 주방의 구조였고 새하얀 침구가 가지런히 정돈된 숙소는 마음에 들었다.
바깥 날씨는 마치 2월 달 같았지만 태양열 주택인지 실내는 훈훈하고 아늑했다. 벽에는 로르부(Rorbuer)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명태를 왼손에 끼고 있는 모습이 독특했다. 보람찬 표정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이 멋져 보인다. 현재도 어부들의 어업은 여전히 성행 중이다.
방을 배정하고 난 너무 피곤해서 방으로 들어가 일단 잠부터 보충했다.
이상한 현상은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해가지지 않는 백야(하얀 밤)를 처음 경험하는 터라 흥분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나친 각성 탓에 날밤을 지새울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다. 우뚝 솟아있는 화강암 봉우리의 바위산을 보고 있는데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풍광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알고 보니 로포텐은 북극권 한계선 위쪽에 있어서
한밤중에도 해를 볼 수 있는 백야현상이 나타난 것이었다.
거의 잠을 설치다시피 하고 다음 날을 맞았다. 그런데 어제 그 좋던 날씨는 언제 그런 적 있었냐는 식으로 안면을 바꾸어 하루 종일 비가 오더니 결국 다음 날 돌아가야 할 배편이 취소되고 말았다. 심상치 않은 날씨라고 생각했지만 여객 편이 취소될 줄은 몰랐다. 나는 사건을 빨리 진정시키기 위해서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배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로포텐을 빠져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비는 태풍이 되었고, 태풍은 산사태를 일으켜 큰 돌들이 굴러와 공항으로 가는 도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그래도 사고 지점까지라도 가보려고 택시를 예약하려 했으니 설상가상 모든 택시회사가 영업을 중단했다.
이렇게 다시 계획표가 뒤집히는 사건을 또 만나게 되다니...; 그때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태풍이 휘몰아쳐도 좋아." 하루 밤만 이라도 자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그렇게 말한 것을 후회했다.
만약 로포텐을 탈출하지 못한다면 일정 중 모든 항공권을 미리 구매해둔 터라, 도미노처럼 밀리게 생겼으니 낭패 중에 낭패가 된다. 그렇지 않아도 뮈르달에서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바람에 피요르드 크루즈도 캔슬되었는데 만약 이 로포텐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어쩌나; 절박해지니 기도가 절로 나왔다. 또다시 실수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어찌하든 내일 이곳을 무사히 탈출하여 오슬로행 비행기를 타게 해달라고 구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길이 막혔다는 그 지점까지만이라도 우리를 데려다 줄 차편을 구하는 일이다. 거기까지만 가면 그래도 희망이 있을 것 같았다. 2명씩 짝을 지어 차편을 헌팅해 보자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팀이 내일 공항 쪽으로 가는 젊은 커플이 있다고 동승을 약속받아왔고 또 다른 8호실 사람들도 우리를 실어주겠다 했다.
풍랑에, 태풍에 산사태에.... 온통 불가항력적인 일일 줄만 알았는데 뭔가 일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이 희망적이었다. "그래, 일단 거기까지만 가보면 뭐가 돼도 될 거야."
다음 날 새벽 일찍 눈이 저절로 떠져 창문부터 열었는데 세상에나! 밤사이에 바로 앞에 있던 바위산이 보이지 않았다. 신기루 같은 현상에 정말 깜짝 놀랐다. 이 무슨 일인가! 아무리 눈을 비비고 쳐다봐도... 감쪽같이 바위산이 보이지 않았다. 기가 막힐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해무' 때문이었다. 나는 해무를 처음 경험해 보는 터라 놀랐고 신비로운 자연의 현상 앞에 경외심이 들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눈에서 사라진다면, 그렇더라도 믿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마을 안쪽을 돌아보니 배들이 정박되어 있었다.
"그래, 배는 정박되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러려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말이 너무 공감되었다. 그래, 맞다. 정박되려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잘 극복해나가야 한다.
해무가 걷히고 있는 바위산이 영화의 세트장처럼 등장했다. 너무나 신비롭게 보여 정말 한참을 바라봤다. 사람의 간을 그렇게 졸이게 하더니 또 이런 환상적인 풍경을 선물하네. 정말 이곳은 극단적인 곳이 분명했다.
분주히 퇴실 준비를 마치고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공항 쪽으로 이동했다. 통제구역에 다다르니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많은 차량이 줄을 지어 있었고, 모두 정지해 있었다. 국도 옆에는 올리브 그린 빛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그곳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아니던가. 마음을 비우고 편편하면서도 큰 바위 위에 모두 모여 마음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들렸다. 언덕을 올라와보니 이미 도로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야호~~~~!!!” 뛸 듯이 기뻤다. 이번에도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지나가는 차를 다시 잡아야 했다. “이번에는 정말 ‘각자도생’이야! 모두 알아서 공항으로 모여!” 그리고 얼마 후 우리 모두는 공항에서 다시 만났다.
돌이켜보면 이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전적으로 우리가 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주저앉지 않고 직면해 봤을 뿐이다. 그렇게 두려움의 서막을 알렸던 여행의 전반전이 마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