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시 산책
포에틱 에세이/ 연재
시에 있어서의 겨울은 어떤 이미지 일까? 색깔로 말하면 하얀색이 어울릴 것이다
흰색은 빛의 삼원색의 혼합이다 빨강(해) 초록(대지) 파랑(하늘)의 합이니 우주의
합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N. 프라이((Northrop Frye)의 신화원형비평에서 제시한
원형심상(archetypical image)에서 겨울은 밤(하루의 주기)이고 눈(물의 순환주기)이며
죽음(인생)에 해당 한다
봄이 아침(비)-청년이라면 여름은 정오(샘)-장년, 가을은 저녁(강)-노년에 해당한다,
원형은 사물의 근원적인 이미지다 원시 이후로 인간의 집단 무의식에 잠재해온 상징이다
물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 해는 창조 부성(父性)의 원리,
달과 지구(대지)는 모성(母性)의 원리를 대변한다.
겨울은 봄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단순한 죽음(斷滅)이 아닌 새로운 봄(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준비기간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윤회)의 한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겨울은 밤이나 어둠,
차가움 같은 부정적 이미지만 아닌 역설적 심층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즉 따뜻함 은근한 혈육의 사랑, 초월적 사랑 같은 생명의 근원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뜻한 부정(父情)의 상징, 산수유
내 오래된 기억의 저편, 우리네 겨울은 온통 회색빛 이었다 밝은 하양도 푸른 초록도 아닌
우중충한 회색빛, 마치 짙은 안개 속 같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그런 불투명 모호함 예측불가의
불안을 동반한 그런 무채색이었다.
빛바랜 무명옷 소매 겹겹 눌어붙은 땟자국의 흔적 이었다 그런 빛깔은 그대로 시대의 암울한
그림자와 함께 내면 깊이 드리워졌다.
나는 아버지란 이름을 중학교 이후로 더 이상 불러보지 못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겨울이면 따뜻한 아버지의 온기를 느끼곤 한다
겨울이면 하루해가 길었다 어른들은 돌아서면 해지고 끼니 걱정이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언 손을 호호 불며 구슬치기 딱지치기 연날리기로 하루해가 짧았다
연날리기의 재미는 특별했다 연이 하늘 높이 펄럭거리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연이 앞산을 밀어내고 솟아올라 먼 산 너머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연은 내 마음의
상징 이었다 마음의 눈으로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놀다가 지쳐서 집으로 들어오면 아버지는 말없이 내 붉은 귀를 감싸주었다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미리 지핀 화롯가에 나란히 앉아 내 작은 언 발을 녹여주었다
그때 따뜻한 아버지의 손, 가슴으로 전해오는 온기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겨울의 대표적 이미지인 눈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김종길의 ‘성탄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꼽는다
앞의 작품은 드물게 아버지의 사랑(父情)을 노래하고 뒤의 것은 초월적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다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 ‘성탄제’ 전문
어린 시절의 추억과 현재(어른이 되어 그때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된)의 대비로
구성되어있다 그때 아버지의 부정을 생각하면서 지금 삭막해진 세태의 자화상을
‘오브 랩’시킨다 메마른 시대의 회한과 안타까움이 베어난다.
여기서 핵심어는 ‘눈’과 ’산수유 열매‘다 ’눈‘은 아버지의 고난을, ’산수유 열매‘는
부정(父情)을 상징 한다 특히 눈(흰색)-열매(빨간색)의 색채대비가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겨울은 시련이지만 아버지의 순수한 부정(산수유 열매)을 통해 승화된다 또한
시간적 배경을 성탄제로 설정하면서 더욱 숭고한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