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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크리스마스

by 소소러브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저 설렌다. 하지만 그 신나는 날조차 직장인은 출근을 해야 하고, 학생은 등교를 햐여 하며, 주부는 일상의 살림을 이어 나가야 한다. 다행히도 그 설레임은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이어진다. 각자의 일상을 해 내면서 가슴 한 켠에는 몽글몽글 알 수 없는 바람과 설레임을 느끼는 시기가 딱 요맘때가 아닐까.


어제, 내일은 뭘할까 잠시 생각했다. 며칠 전 서해안 갯벌에서 보았던 독수리떼의 장관을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서해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과 목탄 초상화전도 보여주고 싶었다. 작년 이맘때 갔던 크리스마스 느낌을 물씬 느끼게 해주던 앤틱 카페도 아이들과 한번 더 들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평소 자주 가던 칼국수집이나 영양굴밥집을 가면 계획이 딱 들어맞을 것 같았다.


얼마전 치료약을 바꾸면서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원래 먹던 약에서 다른 약으로 바꾼 후 어지럼증과 시야흐림때문에 이전 약으로 다시 바꾸었다. 약을 먹는 시기가 겹쳐버려 보험적용이 안되어 비보험으로 한달 약값만 무려 20만원이 나왔다. 병은 사람만 소진시키는게 아니라 돈도 소진시킴을 온몸으로 다시 느끼게 되었다. (수술할 때 한번더 절감했었다. 그나마 다행히 보험이 큰 몫을 해주었다.)


그래도 이 시즌은 일 년에 딱 한번 있는 소중한 날이니까 특별히 보내주고 싶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아침은 이삭 토스트와 따끈한 우유와 단감으로 로 간단히 때우고 집을 나섰다. 11시 반이었다. 차로 30분 정도 달리자 남편이 가끔 온다는 야외 축구장이 보였다. 그 옆에는 저녁이면 사람들로 꽉 들어 찬다는 파크 골프장도 있었다. 사람들이 없이 한산하니 좋았다. 들녘에는 가을 벼를 추수하고 짚을 단단하고도 야무지게 말아 엮어 하얀 비닐로 씌워두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여유롭고도 고즈넉한 풍경에 마음이 편안해 졌다.


지난번에는 무려 100마리 정도의 독수리떼를 보았는데 오늘은 10마리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독수리가 보이지 않아 내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남편이 한 번 더 가보자고 해서 몇 마리 더 볼 수 있었다. 논 위에 앉아있던 독수리가 대부분이었는데, 다시 갔을 때는 독수리 몇마리가 날고 있어서 그 큰 날개를 퍼득이는 것을 티비 화면이 아닌 실물로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보는 독수리를 보며 신기해 했고 좋아했다.


갑자기 몰려온 허기로 근처 맛집을 찾았지만 다리가 아파 당분간 영업을 못한다는 허영만이 다녀갔다는 백반 맛집은 장사를 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찾다가 어른은 어른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좋아하는 메뉴를 찢어져서 먹자는 의견이 못내 마음이 걸려, 아이들은 칼국수를 먹고 우리는 영양 돌솥밥을 먹을 요량으로 한 식당가를 찾아들어갔다.


빼곡히 들어찬 주차장에서 감을 잡았어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리를 빼곡히 채운 사람들과 칼국수를 데피기 위해 켜놓은 야외용 가스버너의 가스 냄새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미 주문을 한 상태라 그냥 나갈수도 없었다. 엎은데 덮친 격으로 반찬은 손을 델수도 없을 정도로 먹을 것이 없었다. 칼국수도 해산물은 잔뜩 들어간 것 처럼 보였으나, 아무 맛을 느낄 수 없을 지경으로 맹탕이다 싶었다.


조용히 음식을 삼키던 둘째 아이가 대뜸, 그리고 나즈막히 말했다.

"아... 최악의 크리스마스야."


칼국수를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늘 점심은 짬뽕이나 햄버거 같이 좋아하는 면종류를 먹던 둘째 아이가 메뉴 선택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을 한 마디로 토로한 것이다. 먹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이 아이에게, 한끼 한끼는 특별히 더 소중했다.


나는 순간 명치에 먹던 음식이 걸린 기분이 들었다. 밥만 얼른 한공기를 비우고 먼저 밖으로 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서야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언젠가 부터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힘이 든다. 사람이 많은데다 시끄럽기까지하다면 곤혹스럽다. 건강이 좋아지지 않으면 사람이 가장 먼저 느끼는 세가지 스트레스는 인간의 밀도, 소음, 빛이라고 하던 존경하던 노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도망치듯 빠져나와 미술관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 그래도 오늘 좋았던 점도 있지 않았어?"

"그래 맞아, 엄마. 독수리를 봐서 좋았어. 엄마랑 미술관에도 갔고."


"그래. 최악은 아니고 차악(?)정도만 되었던걸로 생각하고 하루의 마무리는 더 좋은 걸로 해보자.


딸아이는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가요대제전을 함께 모여 보려고 근처 친구네로 갔다. 그것으로 그나마 꽤 괜찮은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다. 남편은 저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피자를 시킨다고 했다. 최애 메뉴가 피자인 남편에게는 그것 역시 크리스마스의 훌륭한 선택지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져 밀려오던 피로를 드디어 내려놓았다. 아들은 거실 티비를 켜서 가장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로 허기진 몸과 마음을 달랬다. 특별한 무언가가 아닌 별 볼일 없는 그저 일상의 일들이 크리스마스를 반짝이게 해 주었다.


돌아갈 따뜻한 집이 있고, 만날 친구가 있으며, 맛없었던 음식의 기억을 상쇄시켜줄 또 다른 메뉴와 음식이 크리스마스 저녁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지금은 사소한 것에 일희일비 하는 철부지 초등학생 아들이지만, 곧 중학생이 될 테고 일상이 하루 하루 평온하게 흘러간다는 것 자체가 큰 선물이고 감사임을 알게 되는 날도 곧 올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이 마흔 줄에도 여전히 일희일비하며 사는 나도 있는데 뭘 싶기도 하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켜본 티비에서는 명동성당에서 크리스마스 미사가 있었다며, 아기 예수님 모형을 성모 마리이와 요셉이 함께 있는 마굿간 구유 형성에 내려 놓는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평화의 삶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의 노력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대주교님의 말씀도 이어졌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평화와 기쁨의 정서가 내년에도 여전히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각자의 삶과 자리에서 'peace maker' 로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마음깊이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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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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