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연기의 달인, 그게 바로 나

자존감 새끼 키우기

by 소소

나한테 엄마의 아들이자 가족 중 한 명인 오빠가 있다. 어릴 적부터 티격태격하며 지냈지만, 오빠가 중학생이 되던 시점부터는 싸움의 정도나 빈도가 훨씬 심해졌다. 싸우다가 오빠가 힘으로 제압하거나 때리면 감당할 수가 없어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오빠가 나 때리고 괴롭혀! “

울먹이며 엄마에게 전화하면, 엄마는 늘 같은 말을 했다.

“네가 오빠한테 양보해.”


어떻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항상 불안하게 눈치 보며 지내느라 진을 다 빼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편안하지 않았던 게 이것 때문일까.


‘나는 너무 힘든데, 기댈 곳이 없구나.’


어디에도 내 편은 없다며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했고, 난 친자식이 맞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내가 힘들다고 이야기할 때면 한숨을 쉬던 엄마를 보며 나도 모르게 확신하게 되었다.


‘감정은 드러내는 순간,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다.’


절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스스로가 선언한 뒤로 나는 거짓말 전문가이자 감정 연기의 달인이 되었다. 좋은 것은 싫은 것으로, 싫은 것은 좋은 것처럼 내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로 데뷔하게 된 거다. 스크린 혹은 대중 앞에서 대본을 보며 감정 연기를 하는 배우들처럼 나는 사람들이라는 무대 앞에 서면 진짜 속마음과 감정은 숨긴 채 대사를 내뱉고 표정을 짓고 움직였다.


“혹시 나 이것 좀 빌려줄 수 있어?”

“응 그래, 여기.” (지문: 괜찮은 척하며 흔쾌히 주는 것처럼 망설이지 않는다.)


속마음 : ‘맨날 빌려달라고 하고는 쓰고 돌려준 적이 없는데 이걸 빌려줘야 하나?’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을 너한테 빌려주는 거니까 다 사용하면 바로 돌려줘.”


속마음은 정말 정말 빌려주기 싫었지만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게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아 괜찮은 척을 반복했다. 어느 날 문득 내 가방 속 물건의 반이 그 친구의 것이 되어버린 것을 보고는 깨달았다.


‘대가 없는 친절, 괜찮은 척, 일방적인 인내는 호구가 되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이걸 깨달았다고 안 하던(못하던) 거절을 갑자기 잘하게 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또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돌파구가 없다는 생각이 되면 거짓말을 하면서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곤 했는데, 입 밖으로 뱉은 거짓말이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또한 속였다.


“나 이것 좀 빌려주라. 괜찮지?”

“미안... 이거 나도 빌린 거라, 돌려줘야 해.”


내 것이 아니고 빌린 거라 돌려줘야 한다고 말하면 그 친구는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라고 넘어갔는데, 이 모습을 보면서 울화가 치밀었다. ‘내 물건도 네 것이 아니라고, 나한테 빌렸으면 돌려줘야지!!!’ 속으로는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겉으로는 절대 티 내지 않기 위해 감정을 잡느라 고군분투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그 역할에 빙의한 것 마냥 완벽하게 소화하는 배우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특히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완전히 빠져들어 대사를 던질 땐 나도 극에 몰입해서 순간적으로 그 배우를 미워하거나 욕을 하기도 한다. 매일 같이 내 감정을 연기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생긴 습관 같은 게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 느끼는 감정과는 반대되는 단어를 골라 표현하는, 일명 ‘감정 단어 번역’을 하는 것이다. 하루 반나절을 학교에서 감정 단어 번역과 감정 연기로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오늘의 감정과 대사 복기였다. 분노라는 감정을 느꼈을 때 어떻게 말했었는지, 기쁨을 느꼈을 때 어떻게 표현했는지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내 감정이 티가 나는 대사를 했을 때는 머리를 때리거나 쥐어뜯으며, 이것밖에 안 되냐며 자책도 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알맞은 대사와 지문을 새롭게 작성해서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이렇게 해야지 다짐했다.


실시간으로 느끼는 감정을 감추고 반대로 표현하는 연습을 하다 보니까 나의 감각은 발전하는 게 아니라 점차 퇴화했다. 그리고 남들이 다 웃을 때도 ‘왜 웃지?’ ‘뭐가 웃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감’이라는 단어와 거리감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조차도 내가 진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고, 내가 지금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연기를 한 건지, 진심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나를 지키는 완벽한 방법이라 믿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나의 행동들은 힘들었던 기억들로부터의 도피였으며, 감정을 억지로 감춘다고 해서 받았던 상처가 자연스럽게 치유되거나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다쳐서 피가 나는 상처는 그 상처의 크기에 따라 위험 정도가 다르고 그에 맞는 처치 법도 다르다. 내 몸에 난 상처는 시각적으로 피의 빨간색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딱 느껴지기 때문에 작은 상처엔 소독과 밴드, 더 큰 상처라면 지혈과 붕대, 수술이 필요하다. 마음의 상처도 눈에 보이는 빨간색이라면 조금 더 빨리 지혈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마음이 보내는 빨간색 신호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방치해선 안 된다.


마음이 보내는 빨간색의 신호는 다양했다.

“나 불편해”

“나 우울해”

“나 지쳤어”

“나 힘들어”


이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상처의 크기와 깊이에 맞는 처치가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일수록, 더 정밀한 진단이 필요하다. 내 마음속에 자라던 고통의 덩어리들, 그 실체를 CT로 들여다보듯 마주하는 것. 그건 오롯이 나와 마주하는 시간에서 시작되었다. 혼자 훌쩍 떠난 여행에서 나와 내가 만나는 시간.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잔뜩 하고, 그냥 한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치 청진기를 들고 진찰을 할 때 주변이 소음이 아닌 내 몸의 소리 그대로 온전히 집중해서 듣는 것처럼. 사람이라는 존재는 혼자서만 살 수는 없지만 혼자인 시간이 꼭 필요하다. 누군가의 말소리, 표정, 행동에 영향받지 않고 ‘나’만 볼 수 있으니까.

그 시간이 나에게 말했다.


“오늘, 혹은 어떤 날엔 노이즈캔슬링이 필요해.”


세상에 가득했던 소음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차단해 줄 수 있는 장치가. 그리고 그 장치는 어쩌면 ‘솔직한 감정’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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