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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Sep 27. 2021

베란다 독서

독서하기 좋은 날씨, 새벽

요즘은 호치민의 새벽도 제법 쌀쌀하다.

10년 전 베트남어를 배우러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이른 아침부터 30도를 넘나드는 날씨는 더웠고, 눈부신 태양 때문에 선글라스를 써야 했는데, 참 많이 변했다.

새벽이 지나 날이 밝으면 베란다에서 책을 읽는다. 새로 생긴 취미 생활이다. 한국의 가을 아침 같은 쌀쌀함이 좋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에도, 그냥 앉아서 차를 마시기에도,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좋은 공간이다.


새벽에 일어나면서부터 책을 읽는 시간이 늘었고, 먹는 양도 늘었다. 책은 새벽에 훨씬 더 잘 읽힌다는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했다. 책을 읽다 보면 하고 싶은 일들도 계속 생긴다. 생각은 많지만,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금세 꺼지는 나의 열정도 매일 새벽 독서 덕에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새벽에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아이와 부딪히는 일도 많이 줄었다. 혼나는 일이 줄어드니 아이와의 관계도 많이 좋아지고 있다. 새벽의 힘으로 너그러운 마음이 생긴 덕분이다.

나의 변화는 아이의 변화로 이어졌다. 아이의 공부에 여유가 생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수학 4장, 영어책, 프랑스어 책, 한국어 책 읽기, 꾸준히 피아노 치기 등 하루 동안 꼬박해야 할 일이 많았다. 눈 뜨면 반복되는 엄마의 “했니?”에 지친 아이와 부딪히고 있었다.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일단 작은 수첩을 꺼내서 ‘오늘의 할 일’이라고 적고, 아이가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제안을 했다.

“오늘부터는 공부를 바꿔볼까 해. 네가 스스로 오늘 할 공부를 적어봐. 그래도 수학은 학원을 안 가는 대신 매일 2장 이상은 했으면 좋겠어.”

아이와 합의하고 바꾼 하루 공부 계획은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침마다 스스로 그날 할 공부를 정하니 자기 전까지 할 일은 마치는 편이다. 주말에 할 일은 좀 더 줄이기로 하니 미리 주말에 할 일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나는 과학보다는 사회가 재미있는 것 같아.”라며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도 발견하고 있다.


피아노 학원에  간지 달이 되면서 나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연습해주기를 바라는데 아이는 학원에 가서만 치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고 피아노 치는 것을 싫어하는  아니란다. 욱하는 마음에 피아노 팔아버리겠다고도 윽박질러봤지만,  효과는 10 남짓이었다. 그러던 아이가 요즘은 매일 길지는 않아도 매일 피아노 뚜껑을 열고 스스로 연습을 한다. 뭐든 재미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는 피아노 연습도 재미있게 만들었다. 이름하여 <제목을 맞춰봐>.

아이가 피아노를 치면, 나는 곡의 제목을 맞추면 된다. 혹시라도 자기가 잘못 연주해서 엄마가 못 맞출까 봐 악보에 집중한다. 피아노 치는 아이 옆에 있을 필요는 없다. 되려 자기가 치는 악보가 노출될까 봐 떨어져서 들어달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도, 청소를 하거나 주방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아이의 연습을 도와줄 수 있어서 꽤 괜찮은 연습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노래 제목이 잘 생각이 안 나서 종종 틀린 답을 말하니 아이는 더 재미있어한다. 물론 알면서도 모르는 척 틀려주는 건 엄마의 센스다. 최근에는 학원에서 배우던 교재 말고도 집에 있는 동요집과, 한때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나의 피아노 책까지 꺼내서 쳐보겠다는 열정이 귀엽다.


아침마다 못 일어나는 아이와 실랑이하는 것도 사라졌다. 새벽에는 조심조심 다니다가 아이가 일어날 시간부터는 일부러 생활 소음을 내다보니 나만큼이나 아이의 하루도 빨라졌다. 다시 학교에 등교하기 시작하면 6시에 일어나야 밥 먹고 준비해서 셔틀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걱정됐는데 지연스럽게 해결됐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몰래 수학 문제집을 풀어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아침의 부지런한 습관이라기보다는 엄마를 놀라게 해주고 싶어 하는 장난꾸러기의 마음이 한가득이다.


여전히 알람이 울리는 순간에는 눈 질끈 감고 더 자고 싶지만, 그럼에도 새벽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변하는 것을 내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란다는 새로운 공간의 발견이다.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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