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옛날 생각
한 달 전쯤부터 새벽에 잠이 깬다. 더워서 깨는 건지, 불면증인지, 새벽 3시경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다시 잠들려고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대게는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마시니 본의 아니게 기상시간을 몸에 새기고 있다. 새벽에 일어난 날은 무척 피곤하다. 설사 잠을 자지 않더라도 6시까지 불을 켜지 않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푹 잔 듯 괜찮은데 그 몇 시간을 참지 못해서 불을 켜고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가 급기야는 일어나 커피를 내린다.
새벽에 커피를 마실 때면 대학원 시절이 생각난다. 대학원 기숙사에 앉아있는 것 같다. 당시 기숙사 방에 들여놓은 내 소중한 가전은 커피 메이커와 미니 오븐 토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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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메이커로 한 주전자 가득 커피를 내리고는 종일 마셨다. 보온 기능으로 해 놓으면 커피는 점점 졸아들고 향도 사라지는데, 그게 또 그 맛으로, 소주를 들이키며 이게 인생의 맛이지!라고 외치는 기분으로 마셨다. 가난한 유학생의 낭만 같은 거에 빙의되어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내린 지 하루 이틀 지난 커피를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필터의 원두 찌꺼기에 곰팡이가 핀 것을 보고 기함했다. 다음에 커피를 내릴 때까지 원두 찌꺼기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상태로 심지어 따듯하게 보온이 되고 있었으니. 이후로는 바로바로 커피 찌꺼기를 버렸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그냥 원두 넣는 부분을 열어서 공기가 통하게 했다.
커피 메이커는 필수품이었다. 집에 커피 메이커가 없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덧 에스프레소 머신을 거쳐 핸드드립에 정착하게 되면서 커피 메이커는 집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가끔 떠오른다. 딸깍 버튼을 누르면 꼬록 꼬록 물을 빨아올리고 부르르 물이 끓어오른다. 똑똑 물이 떨어지며 방에 퍼지는 커피 향. 다 되었다고 버튼이 툭 꺼지고 수증기가 오르는 소리. 타이머 기능이 있어 정해진 시간에 자동으로 시작하는 커피 메이커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커피 향과 함께 잠에서 깨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꼭 가지고 싶었는데 결국 가져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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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븐 토스터는 20불 안쪽으로 살 수 있는 저렴한 거였는데 참으로 유용했다. 지금 생각하면 영 이상한데, 첫 학기 내내 삼시세끼 냉동식품만 먹고살았다. 방마다 전자레인지가 있었기 때문에 파스타나 볶음밥 류는 전자레인지에, 튀김류와 피자는 오븐 토스터로 데워 먹었다. 냉동 간편식의 나라 미국, 마트에 가면 다양한 반조리 식품이 눈부시게 휘황찬란해서 하나씩 먹다 보니 한 학기가 다 지나갔다. 단짠 단짠 기름져서 어찌나 맛있던지. 새벽이면 차를 몰고 24시간 여는 마트로 놀러 가는 게 일이었다. 마트는 그야말로 미국 풍요의 상징이었다. 간편식을 먹으며 미국인다움에 동화되는 기분이었다. 빵도 많이 구워 먹었다. 냉장 생지를 사다가 구우면 15분 만에 정말 맛있는 빵이 만들어져서, 내가 베이킹에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심어주었다.
이때 가지고 싶던 꿈의 기기는 브렉퍼스트 메이커라고 오븐 토스터와 커피 머신, 그리고 토스터 위에 계란을 구울 수 있는 팬이 같이 있는 3-in-1 제품이었다. 내 눈엔 최고의 럭셔리 하이테크 물품이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획기적인 물건이 왜 대세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대세가 되지는 못해도 어쨌든 근근이 수요는 있나 보다. 이제는 그다지 원하지 않지만 가지고 싶었던 과거의 마음을 보상하고 싶달까, 한 번 사보고 싶은 생각도 가끔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