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공기에도 감정이 있다
68세. 사투리를 쓰고 언제나 회사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말했던 그는 "여기서 나만 이렇게 떠들어 댄다니까. 왜 이렇게 반응들이 없어?"를 입에 달고 다니던 인사 담당 이사다.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뚜렷이 들렸기에 소영은 분명 그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뒤돌아보다 눈이 마주치면 무시하고 내 갈길을 가려고 마음먹었다. 은행 직원이 뭔 실수를 했는지 직원은 그의 큰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쩔쩔매고 있었다. 소영은 천천히 뒤돌아 보자마자 다행인지 아닌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목소리만 비슷했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소영은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온 지가 2년이 되어간다. 서울에서 지낸다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자신을 혹사한 나머지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위염으로 소활불량은 기본이요, 두통으로 한동안 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소영은 지방에 있는 한 4년제 대학교의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좀 더 넓은 곳에서 일을 배우고 싶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운 좋게 들어간 회사에선 야근을 밥 먹듯이 했고 텃세도 심했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숨겨뒀던 승부욕이 폭발하듯 살벌한 신경전이 오고 갔다. 여직원들 사이에선 시기와 질투로 오해의 덩어리를 만들어냈고 그 덩어리들은 미움과 증오로 커져갔다. 사무실의 이러한 냉랭한 공기를 소영은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래도 한편으론 무던함을 장착했던 소영은 일이 재밌다는 것으로 위안 삼아 그런대로 버텨 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20대의 자신은 도전이 즐거웠고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고 소영은 생각한다.
그때는 성격 좋은 사람처럼 웃음도 많았기에 그저 뭘 해도 헤헤 웃으며 넘겼다. 익명으로 제출한 디자인이 채택돼도, 지나가는 말로 실장이 소영을 칭찬해도 동료들은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그곳은 좋은 대학교에 유학을 갔다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 틈에서 많이 배우며 일하겠다고 다짐했던 소영은 악착같이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능력하에서 노력하며 조금씩 실력이 늘어나는 쪽이었다.
그러다 보니 디자인 감각이 타고났던 사람들과 자신의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 소영의 결과물은 어쩌다 얻어걸린 운 좋은, 그리고 더 이상 이와 같은 일은 생기질 않은 일로 치부해 버렸다. 대책이 없는 건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건지 그래도 소영은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디자인 것이 제품으로 나왔을 때, 그리고 그것이 조금씩 판매가 될 때 소영은 그걸로 만족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삼 년을 버텼다.
이직을 결심하고 소영은 그동안 작업한 것을 외장하드에 업로드하고 있을 때였다. 같은 디자인팀이었지만 업무적인 대화 말고는 하지 않았던 일 년 선배는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작업한 것까지 가져가는 거 아니지? 요즘 포트폴리오는 믿을 게 못하다니까!"
소영은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에 황당하고 놀라웠다. 고생했다는 말대신 마지막까지 그런 말밖에 하지 못하는 것에 소영은 기가 찼다. 뭐 눈에는 뭐밖에 보이지 않는다는데 나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소영은 그를 한번 흘기고 말았다.
그 뒤로 몇 군데의 회사를 더 다니다 서울 살이에 지치기도 했고 아빠의 건강이 좋지 않아 집으로 내려왔다. 소영은 생활력이 강한 편은 아니다. 돈보다는 자유를 원했고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성향이 더 강하고 욕망이라면 자신만의 것을 추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다. 단지 용기가 부족해서 실행에 옮기기까지 생각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이 아빠와 닮았다. 소영의 아버지는 만년 부장이었지만 진급에 큰 욕심이 없었다. 허허실실 성격이 좋아 후배들도 제법 따랐다.
명예퇴직을 한 아빠는 사업과는 적성이 맞지 않는 성향을 누르고 그동안 모은 돈과 퇴직금으로 편의점과 치킨 가게를 연이어했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결국 빚을 지고 말았다. 그 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아빠는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길을 가다 쓰러지기도 했다. 그 뒤 빚은 엄마와 소영, 동생 나영이 책임지고 갚아나갔고 이로부터 해방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소영이 그토록 회사 생활을 접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 빚이라는 큰 짐도 한몫했다. 지금도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빚에서 해방됐다는 것만으로도 소영의 집은 평온한 공기가 흘러 이따금 웃음이 돌곤 했다.
그 뒤로 아빠는 원래의 성향대로 유유자적 친구들과 낚시를 하러 가거나 텃밭을 가꾼다거나 소소한 소일거리를 찾아 회사를 그만두면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실천하고 있다. 다행히 건강은 전보다 나아지고 있어 가족들은 한시름 놓았다. 소영이 백수가 되고 빵집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하고 싶은 것을 도전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이해해 주신 것은 아빠였다. 뭐~ 인생이 별거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제일이지.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속이 터져 자리를 뜨곤 했다.
생활력이 강한 엄마는 젊었을 때부터 공장에 다니며 한 푼 두 푼 알뜰하게 돈을 모았다.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빚 같는데 썼지만 엄마는 내색하지 않고 아빠대신 책임을 짊어지며 가정을 꾸렸다. 그때 혹사한 몸은 지금에 와서야 하나둘씩 고장 신호를 알린다. 다행인 건 조금만 허리가 아파도 발목이 아파도 곧장 한의원으로 달려가는 적극성 덕분에 엄마는 회복이 빠른 편이다. 엄마는 일하던 가닥이 있어서인지 집에서 살림만 하는 것을 답답해한다. 결국 뭐라도 해야겠다며 자격증을 취득해 지금은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이런 엄마의 생활력을 동생 나영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학창 시절부터 자기 용돈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마련했고 대학을 들어가고 졸업할 때까지 일을 쉰 적이 없다. 알뜰살뜰하게 모아 빚 갚는데 보태고 결혼할 때도 집에 손 벌리지 않고 갔다. 이런 나영이기에 마음 약하고 욕심도 없어 보이는 소영을 볼 때면 나영은 답답해하곤 했다. 지금은 휴직계를 내고 육아에 전념하느라 통통하던 살이 쏙 빠진 나영을 소영은 안쓰럽게 생각한다.
소영이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일자리를 알아보다 들어간 곳이 그곳이었다. 작은 도시였지만 시내에서 떨어진 곳에 공장들과 사무실이 제법 있었다. 무엇보다 디자이너를 구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문제는 교통편이었다. 서울에서 지낼 때는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니 굳이 차가 필요 없었다.
스무 살에 따놓은 운전면허는 장롱면허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러자니 세차를 뽑으려니 이곳을 계속 다닐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할부로 무작정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버스를 이용하다 다니면서 차를 사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첫 출근하는 날, 떨리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도착 장소에서 내리는데 뒤에서 어떤 여자가 뒤따라 내린다. 머리를 질끈 묶고 통이 넓은 청바지에 화장을 안 한 듯 수수한 차림이었다. 회사가 마을 입구에 있다 보니 마을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방향이다. 소영은 왠지 이 사람이 면접 때 함께 일할 디자이너가 한 명 있다고 했던 그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소영은 왠지 그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photo by : Unsplash의 Art Institute of Chic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