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공기에도 감정이 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빵집을 나갈 준비를 한다. 걸어서 7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빵집은 가끔 서비스를 두세 개씩 요구하는 막무가내 사람들만 아니면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주인 부부는 첫인상처럼 까탈스럽지 않고 잔소리도 거의 없다시피 하여 무던하게 지낸다.
무엇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고 끝내면 되는 일이라 소영은 만족한다. 이 일이 경력을 만들어 주거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일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하게끔 만들어줄 원동력이 될 것 같아 소영은 용기를 내본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빗자루질을 하고 어제 팔다 남은 빵은 커다란 봉지에 담는다. 새벽 5시에 나와 빵을 만들 준비를 하시는 사장님은 소영이 도착할 때쯤에 따끈한 빵을 준비해 둔다. 빵 냄새는 언제나 맡아도 질리지 않는다. 코로 잠시 음미하던 소영은 테이블과 창문을 깨끗하게 닦고 갓 나온 오늘의 빵을 진열하기 시작한다. 요즘은 부쩍 출근하는 사람들이 식사 대용으로 사가는 날이 많아 아예 오픈 시간을 8시로 정했다. 소영은 'Colse' 팻말을 'Open'으로 바꿔놓고 첫 손님을 맞이한다. 그러다 11시쯤 되면 아주머님이 나오신다.
"좋은 아침! 소영 씨, 오늘은 날씨가 제법 선선하지 않아요. 이제 가을이야."
"안녕하세요. 네 이제 제법 가을 분위기가 나요."
소영은 문득 늘 주고받던 인사에서 잠시 행복감이 들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분을 살피고 오늘도 무사히 지나기를 기도하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가면을 쓰고 꼬박 아홉 시간을 함께해야 했던 불편한 공기를 맞이했던 회사 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돼서 오는 잔잔한 기쁨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다정한 공기가 희석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소영은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소영은 자신이 사람과의 관계가 서툴다는 것을 잘 안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오해로 틀어지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런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그냥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는 타입이다. 노력은 안 해본 건 아니다. 먼저 다가가고 많이 웃고 둥글 둥글게 넘어가기도 했지만 점점 자신과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며 모든 에너지를 소모해 버리는 시간들이 쌓이자 어느 순간 폭발해 버리는 부작용이 발생하곤 했다.
사람들은 그런 소영을 부담스러워 하기 시작했고 거리를 두는 것을 느낄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자신의 노력을 하찮게 넘기는 사람들의 은밀한 제스처를 소영은 귀신같이 알아내고 그것으로 하루의 기분을 영향받는 것이 소영은 괴로웠다.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 벽을 치고 바리캐이드를 세우는 것, 웃는 얼굴보다 무표정으로 굳어버린 근육은 이제 더 자연스럽다.
그래서 소영은 가끔 반갑게 자신을 맞이해 주는 인사가 왠지 어색하고 아름답게 봉긋 올라온 거품이 곧 사라지듯 따듯한 웃음이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하다.
소영은 일을 마치고 은행으로 달려갔다. 딱 일 년이다. 그곳에서 지낸 일 년은 퇴직금을 지키기 위한 시간이었다. 퇴직금을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소영은 그동안 미루고 미뤄뒀던 일들을 하나씩 해보기로 결심했다. 이십 대는 저질러 보는 용기라도 있었지만 삼십 대가 되고 보니 모든 것이 움츠려든다.
손해 볼 것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매사에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신도 점점 그렇게 되기를 주문하듯 소영은 한동안 우울과 무기력에 시달렸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문득 떠오른 시간들이 자신을 세게 누르면 그렇게 계속 납작하게 눌러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떨쳐내려 일어나서 힘을 내보지만 그 힘은 그저 흐물흐물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 나약한 힘일 뿐이었다.
소영은 작고 소중한 퇴직금을 자유롭게 빼서 쓸 수 있는 예적금으로 옮긴 통장을 잠시 바라본다. 써서 없애버리면 그 기억들도 없어질까? 첫 숫자부터 마지막 숫자까지 다양한 숫자로 찍혀있는 숫자들이 꿈틀꿈틀 다른 곳으로 자신의 쓰임을 써 달라고 한껏 부풀어 올라 있는 듯하다. 묶여있지 말고 해방시켜 달라는 외침.
그런데 그 외침과 함께 소영의 뒤편에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은행 전체에 울려 퍼진다. 큰 목소리의 덩어리로 자신을 짓눌렀던 사람. 소영은 순간 표정이 굳어지며 그대로 멈춰 서서 있다. 설마, 정말, 왜 그가 여기에 있는 거지?
photo by : Unsplash의 Museum of New Zealand Te Papa Tongare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