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던 영어를 공부하면서 한 가지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영어를 대신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일본어였다. 어떤 표현을 영어로 하려고 애를 쓰는 순간 모국어인 한국어도 아닌, 엉뚱한 일본어가 등장했다. 이 일을 계기로 내 머릿속에는 언어 주머니가 나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모국어 주머니와 외국어 주머니. 영어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내 두뇌는 외국어 주머니를 마구 뒤진다. 그러고는 영어와 일본어가 뒤섞여 있는 외국어 주머니 중에서 그나마 위에 놓인 일본어를 꺼내버리는 것인가 보다. 한국어는 주머니가 아예 다르니까.
남들보다 영어를 더 공부하진 못했지만, 영어 공부법만큼은 더 많이 공부했다. 영어 공부법에 대해 다룬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영어 문장을 소리 내어 읽거나 말하라고. 영어는, 웬만한 영단어를 알고 있어도 어순을 꿰어 맞추는 속도로는 대화가 진전되기 어렵다. 반복해서 말하고 어순을 체화하는 수밖에.
반면 일본어는 단어 몇 개라도 외워 놓으면 기초 문장을 만들고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 즉, 성인 학습자의 일본어 공부는 ‘어휘 암기’부터 어순이 다른 영어는 ‘소리 내어 말하기’부터. 그런데 이 말하기라는 것이 정말 쉽지가 않다. 맘먹으면 몇 시간씩 앉아서 단어는 외울 수 있어도, 소리 내어 읽는다는 적극적인 학습 행위는 단 일이십 분을 채우기도 정말 어렵다.
새로운 영어 표현을 말하고 싶을 때, 과연 일본어가 아닌 영어 먼저 떠오르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꾸준히 말해 보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영어가 일본어 능력을 넘어서지 못할 때까지는 어김없이 주머니 입구에서 튀어 오르는 일본어를 막을 수도 없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