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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Sep 12. 2023

가을 여행

가을 여행 


인천과 목포를 오가며 주말부부로 지낸 지 4년이 다 돼 간다. 아내는 요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중2병’에 걸린 딸 때문이다. 시간이 최고의 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울화통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내에게도 치료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준비했다. 둘이 떠나는 가을 여행이다.


아내는 목포에서 다섯 시 막차를 타고 인천에 왔다. 네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서인지 피곤해 보였다. 하차장에 있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20년 전 연애할 때 채송화 같던 얼굴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관사로 들어서자 다시 완벽한 아내로 돌아왔다. 사감처럼 이곳저곳의 청소 상태를 지적했다. 점검에 대비해 며칠 전에 대청소했는데도, 눈에 거슬리는 게 많았나 보다. 아내의 손길이 닿은 집안은 훨씬 정갈해졌다.


다음 날, 새벽 네 시쯤 눈을 떴다. 평일이지만, 서둘러야 교통 체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 목적지는 강원도 삼척이다. 인천에서는 세 시간 반쯤 걸린다.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박 4일로 일정을 잡았다. 좋은 음악을 들으며,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처음 들른 곳은 평창에 있는 오대산이다. 아내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곳이었다. 몇 년 전, 나는 선재길(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9.4km의 임도)을 걸었다. 그때 숲에서 방향제의 피톤치드 향이 났다.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에 계곡물이 퀄퀄거리며 흘렀다. 아름드리 전나무, 바위, 계곡이 어우러져 풍광은 좋았지만, 6km쯤 걸으니, 아내가 힘들어했다. 아내는 내 의사를 물었다. 내가 원하면 상원사까지 가겠다고는 했지만, 그만 돌아가자는 게 표정과 말투에 쓰여 있었다. 나도 살짝 지루하긴 했다. 우리는 월정사로 가는 버스를 탔다. 승객은 우리 둘뿐이다. 비포장도로라서 가끔 버스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창밖으로 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버스는 30분쯤 달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꽤 먼 길을 함께 걸었다.


삼척까지 가면서는 특별하게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동해안은 멈추면 그곳이 여행지가 된다. 그만큼 아름다운 바다가 많다. 해안 도로를 타고 이곳저곳 들르며 시간을 보내다 삼척항에 도착했다. 휴가철이 끝나서인지, 해산물이 쌌다. 산오징어를 썰어 주는데, 일곱 마리에 2만 원이다. 술도 샀다. 숙소 창밖 수평선에도 어둠이 내렸다. 쫄깃하면서도 담백한 오징어 회에다가 술을 마셨다. 나이가 들면서 주량이 줄었다. 맥주 두 캔을 마시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더는 마시지 못할 것 같았다. 아내에게 별 보러 가자고 했다. 원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뿌연 별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나는 인조 잔디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봤다. 어릴 적 집마당에서 보던 은하수, 젊은 시절 배를 탈 때 적도에서 쏟아지던 별똥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는 게 이제 가을이다.


둘째 날은 환선굴에 갔다. 10년 전쯤 아이들과 함께 대금굴에 갔다. 동굴에 있는 계곡과 폭포를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그곳이 최고인 줄 알았다. 환선굴에 오기 전까지 말이다. 동굴은 서늘하다 못해 춥기까지 했다. 아내와 함께 한 시간 가까이 동굴을 걸었다. 동굴에 있는 계곡과 폭포, 엄청난 수량, 기암괴석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마터면 이 좋은 델 와보지도 못할 뻔했다. 오는 길엔 '삼척 활기 치유의 숲'에 들렸다. 계획에 없이 이정표를 보고 갔다. 마침 '산림 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있었다. 여섯 쌍의 중년 부부가 함께했다. 오랜만에 귓속말도 나눴다.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도 여러 사람 앞에서 했다. 나는 아들에게, 아내는 딸에게 크리스마스에 도착할 편지도 썼다. 나뭇잎으로 만든 배에 근심과 걱정을 담은 꽃잎을 태워 계곡물에 떠나보냈다. 내가 만든 배도 흔들거리긴 했지만, 잘 흘러갔다. 아내도 수국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셋째 날은 숙소 근처에서 보내기로 했다. 주변 카페를 검색하다 부남 미술관이 눈에 띄었다. 시골 마을에 있는 오래된 수녀원을 개조해서 만든 작은 카페였다. 1층에는 그림이 전시돼 있고 2층이 카페였다. 카페는 한적했다. 사장님은 한눈에도 예술을 하는 분처럼 보였다. 환경 운동도 하고 글도 쓴다고 했다. 가구들과 건물 구조가 유럽의 시골 카페를 연상시켰다. 사장님은 손님에게 예술 작품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시원한 커피 두 잔을 시켰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사장님의 목소리가 잘 어우러졌다. 사장님은 볼일이 있다며, 카페에 우리만 남기고 자리를 비웠다. 어머니와 이름이 똑같은 흰 고양이(삼순)도 주인이 없어지자 당황한 듯했다. 우리는 10분쯤 걸어서 부남 해변에 갔다. <헤어질 결심>의 촬영지다. 미스터리하면서도 여운이 많이 남았던 영화였다. 군사 보호구역이어서 여름철에만 한시적으로만 개방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많이 없었다. 사람의 손이 많이 닿지 않아서인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파도 소리를 들었다. 하늘도 바다도 파랗다. 이곳에 오면 영화와는 다르게 '사랑할 결심'을 할 것만 같았다.


마지막 날, 아내는 원주 문막 정류소에서 광주 가는 버스를 탔다. 대니얼 드레이크는 '여행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예방약이자 치료제이며 동시에 회복제'라고 했다. 우리의 가을 여행도 그랬다. 나는 아내에게 여행에서 쓴 치료비를 보냈다. 그래서인지 아내의 목소리에도 시원한 가을이 온 것 같다.

<부남미술관의 마스코트 '삼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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