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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ther Jul 28. 2024

여름에 빛나는 배롱나무

주변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

  요즘은 아파트 조경수로 배롱나무를 많이 심기 때문에 배롱나무 이야기를 하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모른다. 식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배롱나무지만 백일홍,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려 배롱나무는 초본류 백일홍과 같은 식물로 오인받기 일쑤다. 


  배롱나무를 처음 접했을 때 형광 분홍빛 꽃색 때문에 우리나라 나무가 아니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국립수목원에서 발간한 외래식물도감에는 배롱나무가 삼국시대에 도입된 식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나무가 아니라기엔 삼국시대는 너무 먼 옛날이지 않은가! 나의 경우엔 어릴 때 주변에서 본 적 없는 나무라 더욱 이국적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추위에 약한 배롱나무는 중부 이남에서만 볼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절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배롱나무를 알고 난 뒤로는 방문하는 고택의 뜰에서 흔하게 배롱나무를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이국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우리네 정원에 자리 잡고 있는 나무였던 것이다. 


  배롱나무는 남원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남원 금지면에 자리 잡은 3.15 민주화항쟁 김주열 열사 추모공원 앞을 지나는 17번 국도변 가로수가 모두 배롱나무다. 한여름 우연히 지나다 마주하는 끝없이 이어지는 분홍빛 물결의 배롱나무 가로수길은 11km에 달하여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꽃이 핀 나무 전체의 모습도 인상 깊지만 샛노란 수술을 중심으로 얇은 습자지를 예쁘게 구겨 붙인듯한 꽃 한 송이 한송이가 일반적인 꽃모양은 아니기에 더욱 인상 깊다. 여름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고 알려져 있는 배롱나무는 꽃 한 송이가 여름 내내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궁화와 같이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다만 무궁화와 달리 가지 끝마다 달린 원뿔 모양 꽃대에 콩알같이 앙증맞은 꽃봉오리 중 아래쪽부터 위쪽으로 순서대로 꽃이 핀다. 


  겨우내 죽은 듯 움츠렸던 식물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생명력을 발산하는 봄날에도 배롱나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맨들맨들한 수피로 사월까지 조용히 버틴다. 얼룩덜룩한 무늬가 독특한 배롱나무의 수피와 뒤틀린 듯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가지는 칠월이면 꽃과 어우러져 사계절 중 가장 완벽한 자태를 갖춘다. 화려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여름의 배롱나무는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내가 형광 분홍이라 표현하는 진분홍이 배롱나무의 가장 대표적인 꽃 색이다. 진분홍 외에도 흰색, 빨간색, 연분홍색, 연보라색 등이 있다. 꽃 색만 바뀌었을 뿐인데 꽃 색에 따라 전체적인 나무 느낌은 완전히 달라진다.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진분홍색, 흰색, 연보라색 꽃을 한곳에서 보면 좋을 듯하여 조경하시는 분께 여쭤본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꽃 색과 더불어 생장 형태도 달라 처음에 비슷한 높이의 나무를 어우러지게 심어도 하얀 배롱나무는 위로 높이 자라고 진분홍 배롱나무는 옆으로 퍼지며 자란다고 한다. 정원이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각각이 되기 때문에 처음 의도와는 다른 모습이 된다고 같이 심지 말라고 하셨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시기가 아니어도 배롱나무의 붉은빛 테두리가 있는 광택 나는 동글동글한 잎과 올망졸망 꽃대에 열을 맞춰 맺히는 콩알 같은 꽃봉오리도 사랑스럽다. 으레 좋은 것과 그저 그런 것, 싫은 것이 혼재해 있기 마련인데 배롱나무는 사계절 모든 모습이 좋다. 배롱나무를 보고 있자면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하고 가지도 매끈하니 모난 것 없는 느낌을 받게 된다. 평범하고 온순한 모습 사이사이 숨어 있는 매력과 더불어 꾹꾹 눌러왔던 생명의 에너지를 고된 한 여름에 일시에 뿜어내는 배롱나무의 열정적인 한 해를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개인적으로 하늘하늘 레이스 같은 흰색 꽃잎을 가진 흰색 배롱나무를 좋아한다. 초록잎 위에 소복하게 눈송이가 내려앉은 모습의 흰색 배롱나무는 키가 높아 늘 올려다보아야 하지만 그 그늘 아래에서 꽃을 보고 있자면 근심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분홍 배롱나무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여름 명소 담양 소쇄원 주차장에서 아름다운 흰색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크고 높이 자란 흰색 배롱나무였는데 그 아래 서있자니 흰색 배롱나무 꽃잎이 뜨거운 햇살과 함께 양산 위로 눈 내리듯 떨어졌다. 명소 주차장인 데다 너무 뜨거운 계절적 이유로 그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목적지 소쇄원으로 바삐 발길을 옮기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한 가지에 집중하면 나머지를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 안에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는 풍광이 있는데 주차장 나무 한그루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한 여름 멋진 진분홍 꽃만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 목적지를 향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와 남들과 다른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는 여유, 한 시점에만 머물지 않고 시간을 들여 사계절의 달라짐을 관찰하는 인내, 결과를 부러워하지 않고 긴 과정에 박수를 보내고 본받는 자세를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출퇴근 길에 지나치는 식물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아파트 단지에 심긴 나무가 무엇인지 궁금한 적이 있는가? 내 주변의 식물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이름을 줄줄 외우며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자주보아 반갑고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나의 하루를 행복이란 감정으로 채워가기 위해서는 남들의 시선을 따라 바쁘게 나를 몰아세우지 말고 주변의 작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작은 호흡으로 하나씩 인식의 영역을 넓혀가다 보면 행복의 탑이 점점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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