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슈어의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오고, 중용이 나오고, 공리주의에 실존주의 뭐 그런 단어가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 나름대로 독서를 즐겨하는 사람임에도 나는 철학이 여러 번 보아도 이해하기 힘들다. 사실 고민을 해서 책에 적어 놓은 것을 다시금 보지 않는 한은 기억조차 밀물과 썰물의 차이처럼 금방 빠진다. 그렇다고 우리가 철학을 놓고 살 수 있을까?
마트에 주차장에 즐비한 카트가 있다. 나도 고민한 주제이다. 난 내가 쓴 카트를 매장 안에 넣고 오는 게 맞을까? 직원도 있고, 놓는 구간이 있는 곳 같으니, 쑥 두고 오면 될까? 아니면 최소한 바구니는 두고 왔어야 했나? 그러다 바구니를 놓을 곳을 만들어두지 않은 마트에 속으로 욕 했던 기억은 없던가? 이러한 배려도 우리는 생활 속 철학을 고민하는 나약한 존재이다.
보통은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한심하다는 듯이 중간만 가자는 말로 퉁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아는가? 중용이라는 게 제일 어렵다. 사람은 절대로 완벽하지 않기에 여러 철학자들이 그 중간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잣대에서 보면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아는 철학의 근본 질문에 다다른다.
아마도 저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상담을 하면서 철학적 논리를 가져다 쓴다. 아주 상황에 맞도록 말이다. 사실 답은 있으나, 설명만 어렵게 할 뿐이다. 주로 쓰는 논거로는 공리주의다. 당신이 이런 행동을 함으로 불쌍한 타인은 이러한 혜택을 받게 됩니다. 사회복지직이 갖는 마인드는 전반적으로 공리주의적 평등이다.
하지만 나도 고민했었다. 도덕적 상한선은 어디까지일까? 참 성격이 이상하지만 부자가 기부를 하는 것과 어렵게 살면서 작은 돈이나마 모이는 성금이 그보다 못한 것인가? 아니면 부자면서도 1억을 기부하는 것에 인색한 것이 사람이 옹졸한 것인가?
기부를 해보지 않아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린 왜 정치인의 거짓말에는 너그러우면서도 연예인의 큰 선행에는 색안경을 끼고 이야기 하나? 아니면 나쁜 일을 저지른 연예인을 복귀하자 다시금 사랑할까? 칸트의 순수이성에서는 '독이 든 나무에서 나온 과일'은 나쁜 것임에도 역겹다고 하면서 왜 사랑하는지. 우리는 잘 성명하지 못한다.
과거 일본제품 불매 운동에서 내가 보인 행동도 그랬다. 일본이 그토록 싫음에도 애니를 좋아했다. 결국 내가 보인 선택은 일본 맥주와 포카리라는 음료를 국산으로 대체한 정도이다. 전기차는 어떠한가? 화석 연료가 내차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전기를 무엇으로 만드는지. 우린 잊고 살지 않던가? 오히려 어설픈 지식으로 우린 알게 모르게 독이 든 나무를 심고 있다.
그렇다고 수학처럼 철학을 포기할 수 있을까?
답은 절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타인을 통해서 사람이 된다. 수학이라 이야기해서 어렵지만, 실생활에서 포도 박스와 그 안에 송이를 구분하면서 개수를 파악하는 기본의 개념이 있듯이. 철학도 단순하게 현실이다.
비싸진 결혼식 식사 비용에 축의금을 5만 원을 내야 하는지? 안 가고 그냥 돈만 보낼지? 돈을 더 낼지? 고민하는 고민을 하는 순간 당신은 철학자이다. 상황에 감사하고, 반성하고, 사랑한다면 철학자 이전에 성인이 되었다고 본다.
나는 주말에 마트에 장을 보면서 카트는 가지고 밖을 나가지만, 바구니는 마트 안에 두고 나오는 것으로 하루의 철학을 고민했다. 그리고 실천했으니, 그걸로 충분히다. 물론 내가 살아가면서 마주칠 철학적 고민은 이보다 많겠지만, 우선은 이걸로 오늘은 넘긴다. 그것이 나의 사람다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철학은 어떤가요?
소심하게 질문하며 난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