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이 주는 하루의 여유
오전 8시 20분에는 스틱 하나로 손쉽게 타 먹을 수 있는 믹스커피를 마신다. 산내에 오면서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침에는 일찍 출근하는 편이다. 임용되고 첫날 8시에 출근하던 것이 점점 시간이 빨라졌다. 시청에서 근무할 때는 아침도 먹지 않고 7시에 출근했다. 오죽했으면 계장님이 나를 칭찬한 유일한 내용이 “이 직원은 시청에서 제일 먼저 출근하는 직원입니다.”였다.
그래도 아침에 일찍 출근하는 직원에겐 특권이 하나 있다. 바로 커피 한 잔의 여유이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문, 창문까지 열어 환기를 시킨 후. 컴퓨터 부팅을 하면서, 종이컵에 마시는 모닝 믹스 커피 맛은 아침 꿀잠도 포기하게 만든 매력이 있다. 그렇게 나의 커피 사랑은 유별나다. 믹스커피의 단맛과 부드러움을 만끽하면서 오늘 해야 할 일을 노트에 적어 나간다. 그러면 직원들이 순차적으로 들어온다. 출근하며 들어오는 직원분이 인사하듯 커피를 마시면서 나에게 한 잔 권한다. 그렇게 또 한 잔 마시면 민원인이 들어오는 9시가 된다.
10시쯤 되면 목이 마르다. 아침부터 걸려오는 민원 전화와 슬슬 배부된 문서들과 씨름하다 보면, 집중력은 점점 떨어진다. 그럴 때는 종이컵에 커피 알맹이들을 북 치듯 우두두 떨어트린다. 그리고 색깔도 머릿속 마냥 어두운 블랙커피를 마신다. 이미 갈증은 냉수 한 컵으로 해소했을 텐데, 그래도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면, 순간 잃었던 업무에 총기를 되찾는다. 그리고 씁쓸한 커피 맛으로 입안에 남았던 프림의 단맛은 씻겨 내려간다.
어느 순간 주위가 시끄럽다. 민원인이 왔다. 화가 잔뜩 나서 담당자 얼굴만 보면, 한바탕 욕을 쏟아 낼 것 같은 민원인이 씩씩거리며 내 앞에 온다. 그런 상황에선 자연스럽게 차 한 잔 드리며, 무조건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이 참 신기한 게 그렇게 화를 내던 민원인도 일단 꾸역꾸역 차를 들이밀면, 내 이야기를 듣는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상사가 지원사격을 하면, 99%는 성공한다. 물론 그러다 보면 나도 이미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다.
정오(正午).
점심을 먹고 나면, 직원들과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대화를 나눈다. 오전에 민원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푸념과 함께 짧은 점심시간을 즐긴다. 그렇게 오후가 되면 민원 전화와 출장으로 의식하지 않게 커피 잔을 손에 들고 있다. 그때는 건강 염려로 먹었던 잔 수를 세어 가는 것도 어느덧 포기한다. 책상 위에 쌓인 종이컵을 보고서야 내가 먹어치운 커피의 양을 인식한다.
그렇게 내가 하루에 마신 커피 숫자가 10잔이 넘는다. 늘어나는 뱃살과 이르게 와버린 고혈압 징조에 의사 선생님이 커피 탑을 보았다면 잔소리 좀 했을 것이다. 이렇게 커피를 마신 습관은 4년 전에 같이 일하던 사수 직원이 도청으로 전입하는 바람에 갑자기 혼자 일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사회복지가 전문직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느 정도 경력이 있어야 하는 업무. 수많은 사업으로 다양한 복지 민원 연계를 위해서는 경험이 꼭 필요한 업무. 베테랑 직원이 쏙 빠진 공백을 신규 업무 대행자가 다 흡수해야 하는 상황은 필연적으로 사회복지 업무는 다른 직원들에게도 부담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딱 1년밖에 안된 주민센터 막내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매일 야근을 하면서 믹스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 시간에 한 번씩은 뜨거운 커피를 담은 종이컵을 쥐고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평소에 나는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신다. 매장에서 곰 같은 손으로 에스프레소 전용 잔에 커피를 마시면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다. 그럼에도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고소한 향과 한 모금 마시면 진한 카페인의 전율이 꽤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에스프레소가 맛이 덤덤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피 중독 증상이 심해졌다. 결국 다량의 커피 섭취 습관은 시청에 가서도 늘어나는 업무 강도와 야근으로 마시는 횟수는 줄었지만, 결국 끊지를 못했다. 아이러니하게 산 좋고 물 좋은 면사무소에 와서도 복지 업무뿐만 아니라 지리산의 환경까지 걱정하느라 커피는 더 마시게 되었다.
다만 약간의 변화는 환경 업무를 보면서 쓰레기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는 점. 이젠 종이컵 대신 머그잔을 사용해서 마신다는 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다. 지독한 커피 마니아가 하루에 쏟아내는 종이컵 탑을 줄이는 것이 환경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 손에 살포시 쥐어지는 종이 사이로 전해지는 맛있는 온도를 느낄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커피를 몇 사발 마시고서야 퇴근을 한다. 퇴근길 운전을 위해서 밤에도 차가운 캔 커피를 마신다. 결국 나는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 오면 또 커피를 마실 것이다. 일을 쉬면 과연 커피를 끊을까?
* 이 글은 2019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지금도 커피를 즐겨 마시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