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춘노 Nov 02. 2024

내 마음 같은 볶음밥을 먹다

곡성 <라이첸>에서 볶음밥과 커피 한 잔 마시다

  금요일, 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도 모자라 토요일 새벽까지 내렸다. 가을비라 하기엔 바닥에 웅덩이가 생긴 날이라서 이웃 돕기 물품을 배달하느라 운동화가 축축해졌다. 역시 하루를 열심히 살았던 나는 밥을 먹고 잠이 들었다. 피곤했을 나였지만, 주말임에도 새벽에 눈을 떴다. 


  결국에는 일요일 산불비상근무로 사무실을 나가야 했지만, 출근을 해서 밀린 일을 했다. 남들은 토요일이라서 단풍잎 물든 산으로 여행을 가지만, 올해 직장이 생긴 신규 직원도 나처럼 불안했는지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연말이 오면 지방공무원은 바쁘다. 놀기 좋은 시기에는 축제 행사 지원에 동원되다가 산불근무다 혹은 연말 예산 집행 등으로 야근 아니면, 주말 근무가 많다. 그런 상태에서 신규 직원의 눈동자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웃으며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반어법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난 일을 알려주면서 충고 같은 말을 해버렸다.


  "나처럼 되지 말았으면 좋겠어."


  진심이었는데,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 충고를 해준다고 온전하게 흡수를 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적당히 내일의 내가 할 일을 남겨두곤 퇴근을 했다. 그리고 나처럼 배고파서 경고등이 들어온 차에 주유를 가득하고, 노트에 항상 쓰는 스카치테이프와 곧 결혼하는 분에게 줄 축의금 봉투도 문구점에서 샀다. 그렇게 부모님 집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배고픈 나에게 선물하듯이 곡성에 라이첸을 갔다. 


  어느 순간 중국집에서 볶음밥은 먹지 않았다. 어릴 땐 참 즐겨 먹었던 메뉴인데, 기름진 맛 때문에 속이 불편해서 그런지 더는 주문할 일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내가 어릴 적에 먹던 맛이 아니었다. 고슬고슬한 밥에 알록달록한 야채가 골고루 섞여서 계란 코팅까지 적당히 두른 깔끔한 맛이 요즘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오히려 칼국수 가게 후식 볶음밥이 더 맛있을 정도였으니까. 

  사실은 수제비를 먹고 싶었지만, 주인 사정으로 문을 닫을 것을 보고는 바로 달려간 곡성이었다. 그랬기에 뭘 먹어도 좋았을 점심이었지만, 밥이 먹고 싶었다. 많이 먹을 작정으로 곱빼기로 시켰는데, 막상 나온 음식을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짜장 소스 맛이 아니라 진정한 볶음밥으로만 먹어도 맛있었다. 꼭꼭 씹다가 목이 막히면 짜지 않으면서 시원한 짬뽕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또 김치와 단무지로 혹은 살짝 비빈 짜장 소스에 변주를 주면서 먹는 맛이란 곱빼기의 양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솔직히 먹부심 있는 사람이라면 짬뽕도 탐이 났을 것 같지만, 혼자 먹는 사람에게는 이만한 곱빼기의 사치만으로도 한계였다. 

  그리고 바로 나와서 커피숍에서 내가 좋아하는 헤이즐럿 커피를 마셨다. 여름에도 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이지만, 찬바람이 불어서 외투가 필요한 가을에는 이만한 맛도 없을 것이다. 은은하게 퍼지는 달달한 향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오늘 신규 직원에게 조언을 했지만, 막상 나는 하늘이 맑고, 단풍잎이 아름다운 이런 가을 주말에 혼자서 볶음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온전하게 가을을 즐기지 못하는 나는 이렇게 그럭저럭 하루를 보내는데 충고를 할 수 있었을까?


   '나처럼 되지 말았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어쩌면 나에게 했던 말일지도 몰랐다. 


  삶이 온전하느냐는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해서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상담을 하는 나였다. 8년 전에도 그랬고, 직장을 갖기 전에는 잠도 아껴가면서 공부를 했다. 생각해 보니 42년이란 시간은 부족했던 것들을 채우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런데 제자리다. 분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지난 몇 년을 난 작은 원룸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사람마저 싫어서 밀어낸 인연도 얼마던가? 


  그럼에도 세상은 계절처럼 잘 흘러가고 있었다. 억울하지만 그게 또한 삶이었다. 그런 모습이 아니꼬워서 솔직하게 말하고 쓰던 버릇 덕분에 나에게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너무 솔직했던가? 그래서 사람들이 좀처럼 믿지는 않지만, 난 아직도 사람들이 무섭다. 이렇게 혼자서 하루를 보내면서 노트에 내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거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흘러갈 계절이라면, 나의 마음 한가운데에 와버린 가을도 휙 지나가지 않을지. 


  남들은 산과 바다로 떠나서 알록달록 즐기는 가을을 나는 내 마음처럼 복잡한 여러 색을 지닌 볶음밥을 먹고, 향이 진한 커피 한 잔의 온기를 느끼며 흘려보내는 중이다. 모처럼 '윤하의 기다리다'를 들으면서...


이전 25화 소문난 공문 생산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