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좋은 기억은 그리도 쉽게 잊는다
퇴근을 하고, 차를 버리듯이 주차하고는 일단 거리를 걸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가을바람과 하늘의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지만, 난 집을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딱히 집에 들어가 봐야 눕기만 할 것이기에 나는 매일을 무작정 걷는 중이다. 스스로 만보고행을 시작한 지는 이제 일주일이 되어 갔다.
역시나 지나가는 사람들 손에는 우산이 하나씩 들려 있어도 어쩐지 어제 같은 잔잔한 비라면 맞고 가도 되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비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갖고, 난 고행의 걸음을 걸었다. 무거운 몸에서 땀이 머리를 타고 흘렀다. 입었던 옷에서는 흥건해진 땀으로 몸 자체는 가벼워도 전반적인 습기는 몸을 무겁게 했다.
그러다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것이 어제의 소심한 빗방울이 아니었다. 나는 급하게 다리 밑에서 비를 피하고 하늘을 보았다. 아마 조명이 없었다면, 어둠에 빗방울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리 배수관으로 빗물이 쏟아지고, 다리 밑 이외의 바닥은 척척해지고 있었다. 아니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 버렸다. 그렇게 무심하게 나는 횡단보도의 불빛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몽롱한 정신처럼 흔적 없이 우주에 미아가 되어버린 느낌.
붉게 빛나다가 파랗게 빛나다가 다시금 붉게 빛나는 신호등 밑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다리밑 짧은 노숙을 위해서 누군가 만들어 놓은 돌 의자에 앉아서 생각했다.
알면서도 당한 조난에 계속 있을 것인지? 아니면 온몸이 젖어도 다른 사람들처럼 뛰쳐나가야 할지?
난 결국 기다렸다. 시간은 아깝지만, 그래도 언젠가 비는 그치겠지. 아니면 조금 빗줄기가 맞을만하다고 싶으면, 어제처럼 뛰어가기 위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얼마 전의 나였다면, 비를 맞기도 전에 우산을 챙겼거나, 그조차도 싫어서 외출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참 이상하다. 안 좋은 추억이 처음도 아닌데, 알면서도 자신감인지. 아니면 무엇에 홀리듯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 보면 말이다.
나는 그제야 내가 왜 만보를 걷기 위해서 걷고 있는 이유를 떠올렸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보고자 무작정 어둠 속에서 걷던 일주일 전이다.
역시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무언가를 잊는다. 비를 맞으며 걷지 않겠다고 생각하고는 몸이 반응해서 뛰고 있었다. 땀과 비와 거침 숨소리뿐인 그 시간은 혹시 다른 날도 같을지도 모르지만, 뛰게 된 이유는 잊지 않을 생각이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그건 가슴속에서 평생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