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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May 09. 2019

#22. 세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개가 죽고 나서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는 건 자신의 일부분도 함께 죽는 일이다.


 아버지가 죽고 1년 뒤 할아버지가 죽었고, 할아버지가 죽고 2년 뒤 할머니가 죽었고, 할머니가 죽고 1년 뒤 동동이가 죽었다. 동동이는 십 년 넘게 함께 살았던 내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반려견이다.

 동동이를 제외한다면 나보다 윗사람들이기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그들이 어디론가 돌아갔다기보다 죽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은 내가 찾아갈 수 있는 곳에 머물러 있지 않다. 내가 죽더라도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은 필히 죽음을 경험하지만, 그 얘기를 들을 방법은 없다. 죽음 이후에 저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장대한 ‘죽음’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죽음에 관한 글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에 쓰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본인이 아직 벗어나지 못한 일을 주제로 글을 쓰면 안 된다 들었다. 그런 글은 독자를 염두하고 쓴 글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쓴다. 언젠가는 괜찮아지고 나아질 거라 생각하며 쓰기를 미루었던 글이다.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홀로 몇 번이나 글을 써서 간직하기도 했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써서 내보내야 한다고 느꼈다.



 다시 이 연쇄적인 죽음으로 돌아가자.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는 결국 술 때문에 죽었다. 내가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인지할 때부터 아버지는 술과 싸웠다. 얼마나 장엄하게 싸웠던지 대상을 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바꾼다면 멋진 히어로 영화 한 편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물론 아버지는 대부분 술에게 패했으며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요즘에는 예전처럼 꼭 이기는 영웅만 등장하지 않는다. 지고 지고 지고 지고 가끔 이기다가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결국 지는. 이런 식의 영웅도 있지 않은가.

 내가 군대에서 전역한 지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죽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병원에 옮겨진 아버지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장기간 입원해 있다가 돌아가신 게 아니기에 가족들을 덜 힘들 게 했다며 남은 사람들에겐 고마운 일이라 했다. '고마운 일'. 아마 그들 나름대로 건네는 위로의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주는 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뒤로 누군가 큰일을 겪었을 때 부러 형식적인 위로 이상의 말은 건네지 않는다. 대신 몸으로 움직인다. 장례식장에서 도울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고, 신경 써야 할 부분을 줄여주고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준다. 말보다는 실질적인 도움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이별은 나중에 온다. 병원 의사가 사망시간을 알리는 와중이나 사망진단서를 받으러 가는 길에 오지 않는다. 장례식 비용을 계산하는 때나 문상객을 맞이할 때 오지 않는다. 모든 일을 마친 뒤 자신의 방에 불을 끄고 홀로 누웠을 때 온다. 죽은 사람과의 이별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이 이별의 과정이 언제 끝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장례식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긴 위로의 말보다 몸을 움직여 도와주는 일이 더 고마울 것이다. 그 사람은 아직 이별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는 건 자신의 일부분도 함께 죽는 일이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둘이 같이 보내는 시간은 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반려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과의 시간은 이제 추억으로만 존재할 뿐 새롭게 생성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매년 조금씩 그들과의 추억을 잊는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순간들은 남겠지만,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있다. 내 일부분도 함께 죽었다.


 연쇄적인 죽음을 경험하는 중 대학에 복학한 나는 철학을 복수로 전공했고, 졸업 논문 주제를 죽음으로 잡았다. 그리고 밤마다 글을 썼다. 중학생 때는 판타지 소설을 썼고, 고등학생 때는 시를 썼고, 대학생 때는 소설을 썼었다. 중학생 때 쓰던 판타지 소설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얼마 전 우연히 이 원고를 발견하고는 정부의 기밀문서를 발견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원고를 품에 안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빠르게 없애버렸다), 고등학생 때 쓰던 시는 문예창작과 대학 입시에 모두 떨어진 뒤 중단하였고(그 꼬마 시인은 아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글쓰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대학생 때 쓰던 소설은 신춘문예에 계속 떨어진 뒤 들여다보지 않고 있다(물론 나는 언젠가 소설가로 살 것이다).


 죽고 죽고 죽고 죽었다. 나는 매번 살아남았고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아직도 그들과 이별하는 중에 있다. 그리고 쓴다. 세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개가 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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