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안전벨트
아빠와의 추억 중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도로가에 개나리가 많이 피었고 옆에는 강이 흘렀다. 개나리가 피는 이 맘때가 되면 아빠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던 그 풍경이 떠오른다.
나는 자주 배가 아픈 아이였다. 원인 모를 두통도 자주 있어서 큰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았는데 모두 이상 없음으로 나왔다. 엄마는 계절마다 한약을 지어 먹였고 아빠는 내가 학교에서 배가 아프다고 연락을 하면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그때 우리 집은 읍내에 나가려면 오토바이로 2,30분을 가야 했다. 다섯 식구가 다닥다닥 붙어 그렇게 읍내를 다녔다. 우리가 어릴 적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병원에 갈 때마다 아빠는 오토바이에 태워 아빠의 넥타이로 안전벨트를 해줬다. 아빠의 허리와 내 허리를 넥타이로 꽁꽁 묶고 자주 뒤를 돌아보며 운전을 했다. 나는 아빠의 커다란 등에 기대어 개나리 꽃을 구경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 우리집에 처음으로 차가 생겼다. 그게 좋았던지 차모양이 아직까지 생각 난다. 아빠는 농촌에 작은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우리 삼 남매를 참 많이 사랑해 주셨다. 내가 고등학생 때 야자 끝나고 밤 11시에 버스에서 내리면 새벽에 일어나야 할 텐데도 늦은 밤 데리러 나왔다. 지금 내가 아이 픽업을 다녀보니 아빠에게 받아봐서 할 수 있는 거란 걸 알게 되었다.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일인지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학생 때까지 자기전에 이불을 깔아주었다. 나는 당연시 하며 누렸다. 후에 어느 집이나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넉넉하게 입히지 못하고 먹이지 못하는 걸 이렇게라도 대신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도와 달라고 기도하던 아빠의 기도가 생각난다. 매일 밤 강대상에 엎드려 기도하던 아빠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다. 나이가 들수록 또 내가 부모님이 가는 길을 함께 걸으며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오른다. 얼마나 어려웠을까. 삼 남매 키우느라 많이 고단했겠네. 걱정도 미안함도 많았겠구나. 그 어려운 형편에 이것도 저것도 참고 희생하며 그렇게 키워주셨구나!
아빠의 넥타이에 아빠 마음이 다 녹아있다. 오토바이에 태워 바람을 다 맞으며 읍내 병원에 데려가는 아빠의 미안함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담겼다. 이제야 의미들이 깨달아진다. 그때의 커다란 아빠의 등은 많이 왜소해졌다. 나는 아빠에게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어릴때부터 나라도 짐주지 말자 주의였다. 그러다보니 사랑표현도 서툴다. 아빠에게 언젠가 닿겠거니 여전히 미루고 또 미룬다. 말 안 해도 알지 않을까. 아니다. 그래도 언젠가 표현해야 겠다. 그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그리고 너무 애썼다고 말해야겠다. 아빠는 그때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고.. 그래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고 말이다. 아빠는 은퇴를 앞두고 옛날 이야기를 많이 꺼낸다. 또 그소리 한다고 핀잔하지 말고 들어줘야 겠다. 이제야 돌아본다... 이제야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