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람과 그 밖에 타자들로 구성된 세상
한국은 아이돌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정신적인 케어를 거의 못 받고 사는 곳이다. 표면적으로는 전문적인 상담 문화가 정착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는 한국 사회 역시 나와 우리 그리고 철저한 타자들로 구성된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신입일 때 막말로 정병올 일들이 좀 있었는데 혼자 몰래 울다 마주친 한 선배에게 들었던 말이 상의할만한 다른 사람을 찾아봐라였었다.
시간이 꽤 지나고 돌이켜보면 참 야박한 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선배 역시 자기 사람과 아닌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별을 하고 사는 거겠지. 신입의 문제가 느닷없이 자신의 삶을 침범하는 것도 무거웠을 거고. 이해한다.
흔히 일본인들을 혼네와 다테마에로 이분화된 민족이라고 하지만 한국인들 역시 혈연으로 엮인 게 아니라면 철저한 남이라는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한 이분법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혼네의 범위가 ‘내 사람’들인 한국은 그 범위가 자기 자신인 일본보다는 조금 더 넓을 뿐이다.
인스타 같은 SNS 개인 게시글에 자주 보이는 문구가 있다.
마음이나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들이지 말고 ‘내 사람’들에게나 잘해줘야지.
하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실은 따뜻하고 상냥하다. 마음이 여리다 보니 상처를 많이 입고 그러다 보니 저런 말을 하게 되는 거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저 멘탈리티는 내 사람에 속하지 않은 타자들에게는 가혹해질 수도 있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참 차갑다.
라고 느끼면서도 그런데 뭐 원래 그런 거지 뭐. 내 사람 챙기면서 살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어란 생각이 동시에 든다. 신이 아니잖아 우리는. 응.
그러다 <다음 소희>를 보다 배두나가 한 청년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신에게라도 전화하라고 말을 건네는 장면에서 마음이 조금 내려앉았었다. 용감하네. 무모하고.
불운이 닥친 한 사람이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장소가 된다는 것은 결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대체로 불행에는 복잡한 원인이 있고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겹겹이 뚫고 나가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개인은 대개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안정한 사람은 수시로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러나 문제 해결이 요원하다 보니 무기력해지기 쉽고 정작 해답을 위한 노력은 회피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받아주는 사람의 일상에도 지장이 생길 만큼 의존하다 양 쪽 모두 파국이 나기도 하고.
이 무게를 알면서도 형사는 손을 건넨다. 어쨌든 이야기해 달라고. 누구라도 필요하면 일단 나에게라도 말을 해달라고. 혈연이나 지연, 그 어떠한 것으로도 연결되어있지 않은 완벽한 타자에게. 그 씬이 너무 숨 막히게 답답하면서도 따뜻하고 따뜻해서 나 역시 믿고 싶어졌다. 결국은 파국이더라도. 엉망진창으로 얽힌대도.
그래. 상담은 분명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분야지만 급하면 일단 뭐라도 들어서 사람은 건져야 할 거 아냐.
꽤 오래전부터 우리가 내 사람이라는 범위를 깨고 나가야 비로소 볼 수 있을 것들에 대해 상상한다. 한국인의 정이란 게 내 사람을 넘어설 수만 있다면.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친구와 지인들을 넘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느 노동자의 외침에 가닿을 수 있다면. 필리핀에서 다른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수입해 들여오는 이모님들과 콜센터에서 폭언을 들으며 일을 하는 소녀에게 미칠 수 있다면. 위협당하는 편의점 알바에게, 국적 없이 태어나는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에게, 가출해서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찾으러 우울증 갤러리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내 사람이란 게 확장될 수만 있다면
내 사람에게 언제든지 힘들면 연락하라고 하는 그 따뜻함들이 완벽한 타자에게도 적용될 수만 있다면
우린 정말 상냥한 세상을 엿볼 수 있을 텐데.
착취가 아니라 연대와 사랑이 가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