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에서 나흘, 아빠의 가출은 길어졌다

#1. 호의와 호구의 경계, 긋지 못해 생긴 우울증

by 안부

”짜요~ 이리와 봐, 짜요 어디 갔어?“

강희가 묻는다.


”이모, 짜요가 누구예요?“

”네가 한번 불러봐 누가 대답하는지.“

아빠가 엄마에게 붙여 준 사랑스러운 별명이었다.

”짜요! 짜~ 조금씩 먹어야지!”

엄마는 식사 때마다 젓갈은 짜니까 조금씩 먹으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짠 음식을 주지 말던지, 왜 주면서 옆에서 잔소리하냐는 아빠의 투정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반항을 함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좀처럼 굽히는 법이 없었다.

이내 해탈한 아빠는 엄마에게 새로운 별명을 붙여주고 나서야

속이 좀 풀렸는지 이내 투덜거림이 사라졌다.


엄마는 전남 고흥에서 나고 자랐지만 열여덟 살 아침은 서울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외숙모가 시집오고 난 후 2개월 만에 독립 선언을 했다.

집에 여자들이 많아 더 이상 손이 필요하지 않다는 합당한 이유였다.

집을 나선 후 찾아간 곳은 방직 공장.

그곳에서 일하게 된 엄마는 시집을 가기 전까지

7년 동안 단 한번도 결근을 한 적이 없었다.

보통 선을 봐서 결혼을 하던 시대에

흔치 않았던 3년간 연애(2년 연애, 1년간의 공백)를 하면서도 말이다.


엄마는 아빠가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다.

데이트를 하러 나온 사람의 차림새가 맘에 쏙 들지 않았다고 한다.

후줄근한 옷에 무슨 자신감인지 매번 슬리퍼를 신고 엄마를 찾아왔다.

그래서 데이트 요청이 와도 비가 오면 안 나가고,

야간 출근이여도 오후 출근이라며 한 두 시간 만나주고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고 했다. 단 한가지 맘에 든 것은 얼굴뿐 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과 결혼은 아니다 싶어 1년의 공백기를 가졌다.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회사로 찾아왔다. 우리 아들 살려달라고.

한 번 만 다시 만나 달라고 애원했다.

엄마는 그때 나의 성실함이 이렇게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줄 몰랐다고 한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대목 중 하나였다고.

두 분은 정반대의 성향이다. 엄마는 허술해 보이지만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었고,

아빠는 오늘 하루만 행복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결혼 생활이 순탄했을 리가 없었다.

스물 다섯에 결혼한 아빠는 그저 친구가 좋고 사람이 좋았다.

평생 가족보다 외부 사람들을 정성껏 살피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우리에게는 다정했던 아빠지만 엄마에게만은 따듯하지 못한

모습을 보며 서운할 때가 많이 있었다.


아빠의 직업은 전기 기술자였다.

일당이 센 편이었지만 비가 오는 날은 현장이 모두 쉬어 일을 할 수 없었다.

매달 벌어오는 벌이가 일정치 않았다. 엄마는 세 아이를 키우며 버거움을 느꼈다.

평소 엄마를 예쁘게 봐온 당숙모 할머니는 교장 선생님을 하고 계신 할아버지를 설득해

아빠를 학교로 불러주셨다.


아빠는 공무원은 급여가 적어서 싫다고 했다. 엄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월급을 안 갖다 줘도 괜찮으니 아이들 학자금이라도 보탤 수 있게 다니자고 했다.

약속을 지키듯 엄마는 아빠의 급여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돈을 벌면 아빠는 주로 자신을 위해서 썼고,

월급의 30프로 정도만 집에 갖다 줬다.

정년 퇴임 할 시기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기간제로 다시 남아서 일을 더 해달라는 부탁을 들었지만 거절했다.

기동력이 좋았던 아빠는 바깥 공기가 쐬고 싶었던 것이다.

시간이 많아지자 친구들과의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

중장비를 하는 친구의 현장에가서 친구의 일을 돕는게 더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손재주가 좋아 여기저기서 아빠를 찾는 일이 많았다.

퇴임 전에도 주말이 되면 출근하는 날 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고

사람들의 사소한 부탁을 다 해결해주었다.

잠을 자다가, 또는 가족들과 식사를 하다가도 매일 어딘가로 출동해야 했다.

심지어 동네 아주머니들의 장을 볼 때도 아빠의 차가 유용하게 쓰였다.

친구가 있던 현장에서는 하나둘씩 맡겨지는 일들이 많아졌다.

거절 할 줄 모르는 성격을 가진 아빠가 처음에는 좋게 행했던 일들이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호의가 반복되면 호구가 되듯 옆에서 보기에는 답답 했지만

아빠는 그마저도 즐겁게 응하고 있었다. 내색을 안 했기에 그런 줄만 알았다.


어느 날부터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길가에 누워있다가 경찰차를 타고 귀가 하는 일이 생겼다.

대리운전 기사에게 험한 말을 해서 감당하기 힘들다는 말도 들려온다.

아파트 화단에 누워계신다는 연락을 몇 번 받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경비 아저씨는 단지내 누워있는 사람만 보면 새벽 4시에도 인터폰을 눌러댔다.

아저씨 귀가 하셨냐고.

평생 가족보다 친구가 우선이었던 아빠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종종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술은 다 내가 사주는데 막상 필요한 때가 되면 내 편이 없어.“


단 한번도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친구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면 언제나 우리를 나무랐다.

이제는 가만히 듣는다. 사사건건 온갖 짜증 섞인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믿었던 친구에게,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회의감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몰랐다. 아빠는 우울증이 시작됐다.

주어진 일이 대가를 바라고 시작한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 줄 것이라 생각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아빠가 사라졌다.

예전에도 부부싸움을 하다가 본인의 화에 못 이겨 종종 집을 나섰지만, 반나절이면 돌아왔다.

이번엔 달랐다. 벌써 나흘째라고 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 힘없는 엄마의 목소리에 무슨일이 있는지 꼬치꼬치 물으니 대답했다.

자식들한테 걱정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고.

늦게나마 이 사실을 안 오빠가 아빠를 찾아갔다. 이틀 후 아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아빠는 다시 집을 나섰다. 월요일 새벽 5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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