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요리(8)
뭔가 살짝씩 버전 업이 되고 있다. '요리의 달인'이나 '거성(?)'이 됐다는 뜻은 아니다. 어떻게 어떻게 오늘 하루치 먹거리를 해결했다 정도의 의미다.
배추 한 포기와 무 한단
교문을 후다닥 뛰어나온 아이의 손에 까만 봉지가 들려있었다. 이게 뭐야? 하니까, 자기가 수확한 배추랑 무라면서 배시시 웃는다. 봉지도 자기가 묶었단다. 그래? 이거로 김치 만들고, 뭇국도 끓여주세요. 했다.
집에 와서 봉지를 열어 안에 들어있던 것을 꺼냈다. 아주 싱싱한 배추와 무였다. 오마나. 상한데도 없이 파릇하네. 이거 어떻게 키운 거야? 했더니.. 엄청 뿌듯한 얼굴이다. 점심시간마다 마당에 물통 가져가서 이렇게 확.. 부어주고, 쉬는 시간에도 가끔 물을 부어줬단다. 열심히 물 주고 또 주었다고 했다.
원래 키우던 배추 화분이 죽어서, 담임선생님이 키우시던걸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더 보살핀 거라는데 듣고 보니 더 파릇파릇하고 싱싱해 보였다. 틈나는 대로 자그마한 손에 물통을 쥐고 쪼르르 마당에 나가 화분에 물을 주었을 아이를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아이고야.. 이 소중한걸 어떻게 먹냐?
그나저나 나 김치 할 줄 모르는데 어째? 하고 고민이 됐다.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가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갑자기 팔과 어깨가 아파 통증의학과 가서 주사를 맞게 됐다. 큰일이네. 더 미루면 상하겠다 싶어 용기를 냈다. 그렇다. 아직도 요리가 낯선 나는 늘 뭘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시행착오 - 시간이 주는 선물
일단 김치는 포기했다.
예전에 깍두기를 실패한 이후 김치 쪽은 아예 관심을 끊었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한 포기나 한단 가지고 김치를 한다는 것 자체도 무리였다. 고수면 모르겠지만... 일단 할 수 있을 것 같은 걸 해보기로 했다.
배춧잎 몇 개를 뜯어서 국을 끓였다. 살짝 찾아보니, 쌀뜨물을 넣고 끓여주면 시원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배추가 너무 세서 살짝 끓는 물에 데친 다음에 넣어줬다. 된장 두 숟가락에 간도 조금 맞춰주니 괜찮게 됐다.
무도 내버려 둘 수 없어 뭔가를 했다.
귀여운 무는 잘라서 놔두고, 무청을 잘라 볶아줬다. 이것도 역시 조금 찾아본 다음에 하라는 대로 해줬다. 들기름도 사고, 큰맘 먹고 웍(궁중팬)도 샀다. 들기름을 처음 사봤다. 믿거나 말거나.. 웍도. 웍은 집에 있는 프라이팬이 낮아서 기름이 많이 튀길래 산거다.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통증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그래도 나아가는 중이다 생각하고 힘을 냈다. 배춧국도 무청볶음도 아이가 잘 먹었다. 아이가 먹는 모습을 보며 나도 뿌듯했다. 할 수 있는걸 하나씩 늘려가면 되는 거다. 그러면 된다.
업그레이드 중
밀키트를 애용한다.
재료 손질과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시행착오를 그나마 덜할 수 있다. 때론 잘못 고른 밀키트여서 망하거나 조리를 잘못해서 돌이킬 수 없는 요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 집처럼 많이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밀키트는 정말 도움이 된다.
에그팬도 샀는데, 기름을 골고루 발라주지 않아 뒤집을 때 이상하게 됐다. 망가지기 전에 사진을 찍어서 다행이다. 에효.. 도구의 도움을 받아도 손에 익기 전에는 역시 망친다. 망쳐도 여러 번 망치다 보면 나름 가닥이 잡힐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먹고 산다. 오늘도 잘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예전에는 하지 못했을 먹거리도, 조금씩 용기 내서 해본다. 내일은 또.. 뭘 해서 어떻게 먹을지. 그건 내일 아침에 고민하련다. 요리도 할 수 있는 가짓수가 늘어나고, 나 역시 날마다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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