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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Jun 15. 2022

아주 작은


 오는 오후, 처마 밑에 소년이 서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뛰어서   있는 거리에는 우산을 파는 가게가 없다. 어차피 우산까지 사서 쓰기엔 아까운 비였다. 만날 사람이 거나, 도착해야 하는 곳이 없다면 비를 맞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원하는 곳에 도착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중이었다. 처마 밑에서 그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F는 오지 않을 거야. 우리는 너무 멀어져 버렸고, 그와 친구처럼 보냈던 시간은 전부 다 지나갔으니까. 지나갔다는 것과 과거에 머무르는 것은 왜 정반대 같으면서도 같은 말인지! 사실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날씨가 너무 춥지 않고, 공상할 수 있는 생각거리가 충분하고, 다리가 아플 때 가끔씩 앉을 의자만 있다면 말이야. 그러나 만약 F가 오지 않는다면 이 기다림의 목적이 다른 것이었다고 생각을 바꿔야만 한다. 오지도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것만큼 창피스러운 일은 없으니까. 그래, 딱 비가 내리는 동안 F에게 여기로 올 기회를 주자. 이 비가 그치면 나는 F를 기다리는 일 따위를 하지 않고 이곳을 떠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소년은 비가 오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골목 끝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불렀다. 크고 반복적으로 부르는 것이 어린아이나 개를 부르는 듯했다. 목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불명확하게 들렸다. 소년은 입을 열어 소리를 따라 해 보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이름을 크게 불러선 안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혼잣말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이름을 따라 불렀다. 발성 연습을 하듯이, 아아. 그러자 발아래에서 작게 화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아주 작은 사람이었다. 아주 작고 즐거워 보였다. 흥미로운 풍경이었으나 소년은 작은 사람을 줍는 순간부터 따라올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몸을 숙여 작은 사람을 줍는 대신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처마 끝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백지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흰 하늘은 끝없이 높은 천국의 밑바닥 같기도, 빛으로만 채워진 컨테이너 같기도 했다. 저 위쪽 어딘가에서부터 비가 내려오고 있었다. 빗방울은 점점 거세어지다가 이윽고 쏴아아 하고 쏟아졌다. 소년의 속눈썹까지 물방울의 파편이 튀어 들어왔다. 쏴아, 하며 골목 사이로 차가 지나갔다. 하늘처럼 흰 소나타였다. 차의 움직임에 실려온 바람이 그의 맨 팔에 닿았다. 주변보다 온도가 낮은 서늘한 바람이었다.


어느새 비가 그쳐 가는 듯했다. 소년은 이제 여기에 없다. 그는 수로를 타고 흘러가는 빗물 속에 있다. 물줄기는 졸졸 흘러 도시를  바퀴 크게 돌며, 조금씩 공기 중으로 날아올랐다. 빨랫줄마다 걸린 옷가지와 구두끈으로 매달린 신발들이 새로운 바람을 맞는다. 길에는 자동차가 달린다. 하늘은 흰색에서 다시 푸른 빛으로 혈색을 되찾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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