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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Apr 27. 2020

#8000 이야기

숨죽여 라디오를 켜고

인상 깊은 이메일은 저장해 둔다는 사람 얘기를 읽다가 문자메시지를 저장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다른 친구들처럼 폴더폰을 썼다. 카카오톡이 세상에 등장하기 직전이었다. 지금이야 인내심만 있다면 두 달 전, 세 달 전 내용까지 스크롤해서 볼 수 있지만 그때는 문자함이 포화되면 자동으로 오래된 것부터 지워졌기 때문에 기억하고 싶은 문자들은 따로 보관메시지함에 저장해뒀었다.

대학 입학 후에 첫 아이폰으로 넘어오면서 왜 그 옛날 문자함을 백업해두거나 따로 빼놓을 생각을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마트폰으로 바꾸기 직전 폴더폰에도 분명히 꽤 많은 문자들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가을방학]이나 [브로콜리 너마저]를 좋아하던 친구와 구구절절 길게 노래 해석을 늘어놓기도 하고, 문자로 릴레이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때는 문자 한통당 글자 수 제한도 있었으니까 릴레이 소설은 정말 짧게 티키타카 주고받으면서 썼다. 시도 때도 없이 주인공이 바뀌고 장르도 바뀌었지만 엄청나게 웃기는 내용들이어서 나중에 쭉 읽어 내려가면서 웃기도 했다.


그맘때는 특히 라디오 방송에 문자를 자주 보냈다.


야자 때는 자주 엠피쓰리로 FM 라디오를 들었는데, 책상에는 수능자습서를 펼쳐놓고 멍하게 출근과 퇴근과 불금과 자취생활에 대한 사연을 듣고 있으면 언젠가 나도 향유할 수 있게 될 세계 속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문자로 신청곡을 보내면 5초가 채 되지 않아 짤막하게 미니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푸른밤, OO입니다" 같은 것들. 하나도 빠짐없이 저장해 두었었다.


특히나 새벽방송 DJ들은 언성 높이는 일 없이 우아하게 밤을 같이 지켜 주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보내주는 문자도 소중했다. 광고 듣겠습니다, 하기 전에 #8000번, 문자메시지 50원 긴문자 100원의 정보이용료가 부과됩니다 하고 말하는 멘트까지도 멋지게 들렸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도 다 DJ 이외의 커리어가 있고 TV에서도, 음반가게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연예인들이었지만 그때만큼은 하루종일 잠들어있다가 우리에게 밤 이야기를 속삭여주기 위해 나타나는, 그런 비밀 모임의 리더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라디오를 끼고 있는 게 참 좋았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음악도 많이 배웠고 다른 사람들 사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한동안은 꿈이 라디오 PD이기도 했다.

어쨌든 문자메시지 얘기로 돌아가면 시시각각 바뀌는 자동 답신 메시지를 종류별로 모으고 싶어서 야자 시간 책상 밑으로, 그리고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봉고차 안에서 #8000번으로 문자를 보내곤 했다.

그리고 받은 답장들은 보관메시지함으로 들어갔다. 가끔은 그렇게 보낸 선곡이 노래로 나오기도 했다. 디제이의 목소리로 내가 보낸 노래 제목과 메시지가 흘러나올 땐 전기가 찌릿하고 몸을 흐르는 그런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 받은 메시지들은 자주 다시 꺼내보면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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