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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Jan 27. 2022

갑자기 혼잣말을 하는 나이가 되면

일상 그리고 시간에 대한 사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들어 간혹 무의식적으로 어떤 말이나 구절을 읊조릴 때가 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뭐지? 왜지? 

왜구러지?

노망났나?

미쳤나?


왜 이걸 읊조리고 있는 거지?

나룻배와 행인_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그러다가 검색으로 '나룻배와 행인'을 찾아서 한 글자씩, 그리고 한 줄씩 천천히 읽어본다. 

그래, 이건 어쩌면 시간에 대한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간에 대한 은유... 

나룻배가 나라면, 행인은 당신이자 곧 시간 


시간이나 물은 둘다 명사지만, 동시에 '흐르다'는 동사의 원형을 포함한다. 

시간이 멈추는 것도, 물이 멈추는 것도 현실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우리는, 언제나 나룻배처럼 멈추지 않는 시간을 싣고 현실을 건넌다.

시간의 속성이란 그렇다. 


나는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시간을 싣고 건너는 나룻배라 생각하니 

뭔가, 묘한 느낌이다. 


어떤 시간은 도저히 지나갈 것 같지 않지만, 

결국 지나가고, 나룻배를 통해 물길을 건넌 그 시간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라는 구절처럼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 


그것이, 아픈 시간, 혹은 환희의 시간이든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라는 구절처럼 

나룻배인 나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시간을 싣고 낡아간다.


뭐, 한 글자씩, 한 줄씩 이 시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뜬금없이 Bill Evans가 연주하는 Danny Boy가 듣고 싶어진다. 

뭐지? 왜지? 

왜구러지?

노망났나?

미쳤나?

그리고 또 다른 시의 구절을 읊조리는 나를 발견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뭐지? 왜지? 

왜구러지?

기억의 습곡이여 세월의 단층이여_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살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아 그래, 이성복이었지...

에휴, 언제적 이성복이야... 하며


한 글자씩, 한 줄씩 천천히 읽어본다

천천히 읽어보니 좋네...


그런데, 이것도 이제는 시간에 대한 은유로 들린다

'날들이 흘러갔다'라고 하니까 꼭 시간을 손님으로 태운 나룻배의 느낌이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의 구절에서 느껴지는 시간은 아득한 느낌이다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첫 사랑의 때가 '강이 하늘로 흐를 때'와 잘 어울리는 표현 같다. 

대개 그러한 때는 아픈 결말의 시간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의 구절과 어울린다


한 때는, 참 좋아했던 시였는데...

이렇게 몽상과 망상에 빠져 시를 해석해 보는 밤의 시간을 태우고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한 번 더 읊조려 본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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