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 촬영스텝이 되다.

by 녹음노동자

*최대한 사건은 살리고 작품과 인물을 특정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않기 위해 작품과 인물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삼갑니다. 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드려 죄송합니다.*


<영화 스텝으로 일을 시작하다>

내 이력서를 받은 영화사에서 연락이 왔다. 미술파트를 담당할 연출부를 구하는데 충무로 사무실에서 미팅을 하자는 연락이었다. 이미 프리프로덕션 (사전준비)는 거의 끝이 난 상태이고 현장에서 진행을 도울 연출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충무로에서 조감독과 미팅을 하고 그 자리에서 영화시나리오를 읽었다. 내 기억으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처음으로 읽어 본 시나리오였다. “와 시나리오는 이런 형태로 쓰이는구나” 나는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업무와 페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단지 1달 동안의 촬영이기 때문에 일을 받아들였다. 내가 받는 돈은 고시원 1달 방값에 불과했다. 하지만 점심, 저녁 맛있게 먹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나는 아직도 스텝으로 일을 한 첫날을 기억한다. 강화도에 있는 학교 음악실을 상담실로 바꾸는 것이다. 나는 다른 스텝들보다 하루 일찍 도착해서 음악실을 상담실로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음악실로 미술감독님이 주문한 가구들이 계속 도착했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나는 이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배치도의 세세한 부분을 확인하며 상담실을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스텝들이 도착한다고 하는데 그전에는 겨우 완성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밤늦게 혼자 학교에 있다는 사실이 무서울 뿐이었다. 나는 밤을 새우며 스텝들이 도착하기 전에 상담실을 완성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스텝은 조감독이었다. 조감독은 내가 혼자 학교에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고 일찍 왔다고 했다. 나중에 조감독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를 이렇게 두면 어떡하냐고 미술감독님에게 따진 모양이었다. 조감독은 잠시 눈 좀 붙이라고 했지만 나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내 관심은 오직 촬영현장뿐이었다. 현장에서 리허설이 끝이 나고 조감독이 “레디 액션!!” 소리쳤다. 이렇게 나는 영화스텝으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1달 동안의 촬영은 끝이 났다. 마지막 촬영날은 차이나타운에서 끝이 났는데 밤을 새우고도 시간이 모자라서 마지막 차씬은 아침 해가 뜨고 촬영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차씬이 밤씬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최대한 어두운 주차장 안쪽으로 들어가서 차에 암막천을 둘러 마지막 씬을 겨우 찍었다. 그렇게 1달간의 독립영화 촬영은 끝이 났다. 그동안 나는 집으로 다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화가 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아들이 서울에서 굶어 죽지는 않을까 용돈을 챙겨주셨다. 너무 감사하게도 부모님의 도움으로 나는 고시원방값을 내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음에 영화를 찍으면서 만난 인물 조감독과의 인연으로 나는 두 번째 독립영화로 넘어갔다. 두 번째 영화의 사무실은 인사동에 있었고 주요 촬영지는 강원도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볼 기회가 생겼다. 인사동이라고 하는 곳은 정말 멋진 곳이었고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주변에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어보고 기분이 좋았다. 특히 영화를 만들고자 모인 사람들은 굉장한 영화광이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다. 당시 나도 영화광이어서 다른 사람이 나보다 영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아트시네마, 영상자료원을 다니며 많은 영화를 보았다. 독립영화에는 나보다 2살이 많은 스크립터 누나가 있었다. 누나는 강원도 원주 사람인데 아버님이 선생님이고 꽤나 엄한 집안에서 자란 모양이었다. 누나도 영화일을 하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였다. 누나는 홍제동이고 나는 일산에 살고 있어서 우리는 3호선을 타고 같이 집으로 갈 때가 많았다. 누나는 억압받기에 꽤나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혹은 누나의 집이 있는 홍제동에서 맥주를 마시고는 했다. 한 번은 지하철을 같이 타고 가는데 일본인 여성이 길을 물었다. 우리는 손짓 발짓 하면서 그 장소가 어디인지 최선을 다 해 설명했다. 누나는 일본인에게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나는 그 말에 뭉클했다. “맞아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그 말에 자부심을 느꼈다. 내가 이번에는 길을 잘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조명팀으로>

독립영화를 하는 일은 상업영화와는 다르다. 모든 것이 부족하다. 돈도 인력도 그래서 대부분 자신의 일만 하는 경우는 잘 없다. 촬영팀에서 일손이 필요하면 촬영팀을 도왔다가 조명을 세팅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면 조명팀을 돕기도 한다. 조명일을 도우면서 나는 조명감독님과 조금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조명감독님은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는 생각보다 분명한 선이 있다” 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조명팀이긴 하지만 상업영화를 한 번 경험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해 주었다. 나는 아직 젊고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조명팀 일을 받아들였다. 나는 독립영화가 끝이 나고 상업영화 조명팀에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조명일의 어려움>

상업영화는 독립영화와 많은 것이 달랐다. 조명을 하는 기구들은 하나 같이 무거웠고 급한 경우에는 들고뛰는 일도 허다했다. 근로시간이라는 것도 정해져 있지 않아서 아침에 시작된 촬영은 새벽에 혹은 다음날 아침에 끝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촬영이 끝나면 스텝들은 사람에게 발견된 쥐처럼 후다닥! 사라진다. 다들 영화가 좋아서 모인 사람들인데 촬영이 끝날 때는 모두 질려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아침에 나눠주는 촬영계획표에서 어떤 씬이 삭제되기만 하면 다들 뛸 듯이 기뻐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도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팀이 있으니 조명팀이다. 세팅된 조명기를 정리하고 철수하는 시간이 1시간 혹은 그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집에 도착하면 정말 자리에 눕는 순간에 컴퓨터 전원이 꺼지듯이 내 몸은 잠이 든다. 이렇게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다른 팀들에 비해 팀군기는 강했다. 한 번은 남양주의 세트장 촬영인데 새벽 늦게 촬영이 끝났다. 나는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잠을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형들은 숙소로 돌아가 술을 마시자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팀 안에 분위기는 엄격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술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도저히 몸은 버티지 못하고 나는 술잔을 들고 잠이 들었다. 형들은 "뭐 하냐?"라고 내 허벅지를 걷어차기는 했지만 알고 보면 다들 순박한 형들이라 들어가 자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형들은 내가 옷이 없어서 추운 겨울에도 바람막이 하나만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같이 옷을 사러가기도 하고 맛있는 술과 음식을 사 주기도 했다. 그 당시 영화 한 편의 촬영기간은 보통 3~4 개월씩이 걸린 것 같다. 워낙 일의 강도가 강해서 중간에 나오지 않는 스텝들도 종종 있었다. 심지어는 촬영종료를 며칠 남기지 않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다른 팀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각자의 고충이 있다. 나도 그런 위기를 겪은 적이 있었다. 촬영을 새벽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1,2 시간의 쪽잠을 자고 다시 촬영장으로 나가야 했다. 밤새 일을 하고 1,2시간 동안 체력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잠들면 다시 일어나기가 힘들어서 몇몇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고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깐 잠이 들었다. 알람이 울릴 때는 정말 괴로웠다.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만 또 한편으로 같이 고생하는 형들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나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촬영현장으로 달려갔다.


<모든 안전수칙은 피로 쓰인다>

안전수칙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는 먼저 누군가의 희생을 보고는 한다. 과로로 인한 스텝의 사망 뉴스를 우리는 종종 접할 수 있다. 전태일 열사님이 스스로 몸을 태우며 "근로기준법 준수" 외친 지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왜 지금도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까. 지금도 밤을 새우면서 촬영을 하는 현장을 볼 수 있다. 최근에도 그렇게 밤을 새우면서 일을 하는 것이 위법하지 않다는 판결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법적으로 하루에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시간이 명확하지 않고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음 희생자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희생으로 누군가 단기적으로 이득을 얻었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조직은 결국은 시장에 어두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 수산물시장이나 전통시장에서 저울 치기와 바가지가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한다. 단기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이 장기적으로 시장전체에 나쁜 영향을 준다. 사실 단순히 노동시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시 집으로>

한 번은 버티고개 아파트에서 촬영을 할 때였다. 이날 촬영은 설날 바로 전날인데 나는 촬영을 마치고 오랜만에 경주집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날 촬영은 영화 안에서도 중요한 장면이었고 이미 밤을 새우는 각오는 되어있었다. 비씬이라 살수차가 현장에 비를 계속해서 뿌렸다. 전기와 물이 섞이면 위험하기 때문에 방수와 안전사고 예방은 특히 중요했다. 주민들이 잠을 자는 밤이 되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조명빛과 소음 때문에 민원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들의 고통이 이해가 간다. 하루종일 직장과 학교에서 시달리다 유일하게 마음 편히 쉬는 집에서 마저 휴식을 침해당한다면 그 스트레스는 정말 크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물에 젖은 생쥐가 되어갔다. 이런 촬영에서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피로감은 거의 평소의 두 배에 가까웠다. 새벽으로 넘어가면서 이미 내 체력은 바닥이 났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나는 촬영을 하는 중간에 서서 잠이 들었다. 옆에 지나가는 분장팀은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해했다. "저기 보세요. 조명팀 서서 자요!" 촬영은 아침 해가 뜨면서 종료가 되었다. 다들 새해 덕담을 나누고 서둘러 헤어졌다. 나는 집으로 가서 씻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어디든 그냥 드러눕고 싶었지만 그러면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나는 쓰러져도 열차 안에서 쓰러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 나는 겨우 피로한 몸을 이끌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명절이라 고향에 내려가는 열차에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표를 미리 구하지는 못 했지만 운이 좋게도 객석과 객석사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나는 다행히 중간에 눈을 떠서 부산까지는 내려가지 않고 목적지인 경주역에 내릴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아버지, 어머니와 마주했다. 나는 집에 내려와서는 절대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직 얼굴에 화가 가득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있었다. 나 스스로의 삶을 찾을 때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할 것이라 강하게 믿고 있었다. 그게 깔끔한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회사는 아니어도 말이다. 아쉽게도 설날 전에 고생하면서 찍은 비씬은 통편집되어서 영화에 쓰이지는 않았다. 나는 조명팀으로 1년 정도 일을 하고 녹음팀으로 일을 시작했다.

keyword
이전 04화4. 집을 떠날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