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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취를 하면서 생긴 일들

by 녹음노동자

<이사 준비>

2010년 7월 군을 전역한 후, 독립영화 두 작품 마치고 나니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약속대로 조명팀으로 합류할 준비를 했다. 촬영버스는 보통 신사역 6번 출구에서 출발하는데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고시원을 떠나 서울 중심으로 이동하고자 방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옥수동에 재개발 전인 옥탑방을 찾았다. 재개발이 계획되어 있었지만 잠시 지낼만하다고 생각하고 집을 보러 갔다. 동은 옥수동이었지만 지하철 역은 금호역이 가장 가까웠다.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따르면 지하철에서 5~10분 거리라고 했지만 실제로 도착하니 나로서는 달려서도 10분 안에는 도착을 못 할 거리였다. 거리도 거리지만 올라가는 길이 굉장히 가파른 언덕이었다. 집에 도착을 했는데 다시 좁은 계단을 타고 옥탑으로 올라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옥탑으로 올라오고 나니 아래로 한강이 내려다 보였다. 여기 산인가? 지붕은 세모모양으로 생겼는데 안에서 모서리 부분으로 갈수록 고개를 숙여야 했다. 화장실은 집 밖에 있었는데 허리를 숙이지 않고는 들어갈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시원을 떠나 개인적인 공간이 생긴다는 것에 만족하였다. 게다가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니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사는 지하철로 했다. 짐이랄 게 없어서 종이박스 하나로 이동을 하니 끝이 났다. 겨울이라 이불이 필요했는데 감사하게도 군대동기 친구가 하나 가져다주었다. 다만 이불이 아주 얇아서 아쉽기는 했다.


<옥탑방의 어려움>

친구는 옥탑방에서 잠을 자고 가는 경우가 있었다. 밤새 추위에 떨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둘 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보일러가 잘 작동하지 않아서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했는데 전기장판도 아주 저렴한 것이라 냉골바닥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어제 먹다가 놔둔 술병으로 길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뭐지? 가까이 가서 보는데 개미였다. “맙소사…” 친구는 나를 개미대장이라고 놀렸다. 실제로 옥탑에서 사는 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곧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왔는데 방 안에서도 입김이 나왔다. 안이랑 밖이랑 크게 차이가 없었다. 나는 전기장판에 친구가 가져다준 이불을 머리까지 완전히 덮고 웅크려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밤새 고정된 자세로 자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불사이로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찬바람이 들어와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밖에 있는 화장실은 얼어서 볼일을 볼 수가 없었다. 급할 때는 집 앞에 있는 피시방으로 달려가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피시방이 없어지고는 지하철까지 달려가는 경우도 생겼다. 나는 조명팀 일을 시작을 했다. 당시 일을 할 때는 밤을 새우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밤새 무거운 장비를 들면서 일을 하였다. 아침이면 너무 많이 걷고 달려서 허벅지 사이가 따끔거렸다. 밤을 새우면 택시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나는 지하철을 많이 이용했다. 금호역에 도착하면 옥탑으로 도저히 올라갈 힘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근처 사우나에서 씻고 수면실에서 잠을 자고 집으로 올랐다. 사실 사우나를 이용했던 것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잠을 자고 싶었기 때문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힘들고 고생스러운 날이지만 나는 좀 희망적이고 낙관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언젠가 오늘을 추억을 할 날이 있겠지" 생각했다. 옥탑방은 곧 재개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옥탑방은 없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온다고 한다. 나는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이젠 아침에 일어나 한강을 보면서 소변을 볼 수 없다. “잘 있어 개미들아. 꼭 살아남아 줘”


<이태원의 원룸>

나는 옥수에서 옆으로 벗어나 이태원으로 넘어갔다. 촬영버스는 보통 신사역 6번 출구에서 출발하는데 이태원에서 한강 다리 하나만 건너면 신사였기 때문에 택시비를 아낄 수 있었다. 이태원은 외국인들 정말 많고 꽤나 낭만이 있는 장소였다. 내가 방을 잡은 곳은 이슬람 사원과 가까이 있었다. 근처에는 맛있는 맥주 집도 많이 있었다. 당시 영화에서 녹음팀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같이 일하는 여자 제작부도 해방촌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 여자 제작부는 꽃님이라 부르겠다. 해방촌은 이태원 바로 옆이었다. 해방촌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남산타워가 멋지게 보였다. 나는 영화가 끝이 나고 꽃님이와 자주 만났다. 꽃님이는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우리는 만나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저녁에 카페에서 만나 새벽까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강에서 햄버거에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이태원에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 번은 조금 과음을 한 날이었다. 같이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날 때 비틀거리는 꽃님이의 모습을 보고 많이 취했구나 생각을 했다. 그래도 신이 나는지 꽃님이는 이상한 춤을 추며 걸어갔다. 나는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그녀를 부축했다. 꽃님이는 극구 혼자 가겠다며 사양을 하며 걸어갔는데 평소 가던 집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결국 그녀를 혼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녀가 집으로 잘 도착을 했는지 전화로 확인했다. 꽃님이는 그 짧은 거리에 길을 잃어서 결국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을 했다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했지만 다음에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이태원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꽃님이는 항상 취한 모습이 잘 티가 나지 않아서 긴장하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번에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집으로 혼자 보내는 게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녀와 같이 집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옆 동네라 딱히 어려운 건 없었다. 우리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꽃님이와의 이야기는 항상 재미있었다. 곧 꽃님이의 집으로 도착했다. 나는 그녀와 집 앞에서 헤어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척하고 행여 비틀거리다 계단에서 구르지나 않을까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았다. 그녀는 곧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오 맙소사!!” 키를 그냥 꽃아 두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건 너무 걱정스러웠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열쇠를 챙겨서 집으로 가져다주었다. 나를 먹여 살리겠다던 그녀의 야망은 이루어지지 못 했다. 이태원을 떠올리면 참 순수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집계약이 끝이 나고 나는 이태원을 떠나 은평구 반지하로 이사를 하였다.


<은평구 반지하>

나는 은평구의 반지하로 이사를 했다. 다들 반지하는 살지 말라고 단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이후에 5년 동안 살게 되면서 나도 이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정말 사는 동안 다양한 색깔의 곰팡이들을 많이도 보았다. 햇빛도 거의 들지 않는데 이건 곰팡이에 치명적이다. 그래도 오후로 넘어갈 때는 아주 잠깐 해가 들어오기도 했는데 뒤에 높은 빌라가 들어오면서 해가 전혀 들지 않는 집이 되어 버렸다. 한 번은 아침에 일어나 소변을 누러 화장실에 가는데 , 변기에 죽은 쥐가 둥둥 떠 있었다. “으악!” 쥐가 관을 잘못 타고 내 변기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한전에서 이런 전화를 받았다. “혹시 집에 거주 중이세요?” “네” 전기의 사용량이 사람이 살지 않는 수치로 판단되어 확인 차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겨울에는 전기장판이라도 틀지만 여름에는 선풍기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가스에서도 찾아온 적이 있는데 도시가스 아주머니는 들어오면서부터 “여기 도시가스 고장 났어요” 호들갑을 떨면서 들어왔다. 하지만 곧 몇 가지 점검을 마치더니 “고장이 아니네요” 하면서 나가신 적도 있었다. 그렇게 5년을 살았던 이유는 집주인아저씨가 참 좋으신 분이었다. 나는 월세를 안정적으로 내는 좋은 세입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목돈이나 계약금이 들어올 때는 항상 집세를 먼저 내었다. 한 5달 정도 월세가 밀리 때도 집주인 아저씨는 문자 한 통만 주실뿐이었다. 집주인아저씨는 3층에 살고 계셨는데 같이 심심할 때는 앞에 곱창집에 가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래서 응암동 옥탑으로 이사를 갈 때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은평구 반지하 2>

가난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항상 통장잔고는 0에 수렴한다. 그래도 가장 돈을 빌리기 힘든 사람은 가족이다. 한 번은 통장잔고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n번째 상황이었다. 나는 같이 일을 하는 형에게 받을 돈을 조금 당겨서 받았다. 형은 내 부탁을 들어주었고 곧 통장에 돈이 도착했다. 나는 일단 굶주린 배부터 채웠다. 하지만 곧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나중에 이런 어려움을 또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예감했고 실제로 이후로도 이런 일들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작은 돈이라도 보관을 하자는 생각에 5만 원을 빼서 책 사이에 넣었다. 그리고 내 예감이 적중했다. 나중에 또 돈이 없어서 배를 굶고 있는 상황이 생겼다. 그런데 머릿속에 생각이 스쳤다 “맞다 그때 5만 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무슨 책인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집에 있는 책을 모두 넘겨보며 숨겨놓은 돈을 찾기 시작했다. 무슨 책인지 도저히 돈은 나오지 않아서 결국 포기해 버렸다. 나중에 다시 이사 갈 때 알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너무 잘 알고 “돈을 숨겨 놓은 책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판단하고 휴대폰을 사면서 남은 상자에 보관했던 것이다. 5만 원도 아니도 3만 원인 것을 발견하고 나는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5만 원은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 다시 3만 원을 넣은 게 또 바로 기억이 났다. 참 웃픈 기억이다.


<응암동 옥탑>

나는 오래 동안 산 반지하를 떠나서 응암동으로 조금 내려왔다. 추리드라마가 끝이 나고 쉬는 동안 나는 응암동 옥탑으로 이사를 했다. 다시 옥탑방이지만 이번은 조금 방이 더 깔끔하고 집에서 따뜻한 물도 잘 나왔다. 옥탑방은 오래된 상가건물 6층이었는데 옛날 건물이라 그런지 계단의 높이가 일정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고모가 집을 구하는 것을 같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계약을 했다. 나는 여의도로 출퇴근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드라마촬영을 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 평화로운 시기였다. 쉬는 날에는 카페에서 글을 쓰기도 하고 불광천을 따라서 자전거를 타고 월드컵 경기장에 수영도 다녔다. 벚꽃이 예쁠 때는 불광천의 옆에 한가로이 누워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단점들이 눈에 보였다. 하나는 바퀴벌레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곳 1층에는 대림시장이 있었다. 특히 생선을 파는 곳 때문인지 바퀴벌레들은 잘 먹어서 덩치가 컸다. 게임을 하다가 불쑥! 티브이를 보다가 불쑥! 모습을 보이면 나는 바퀴벌레를 잡아서 변기에 내렸다. 이렇게 덩치가 큰 벌레들이 어떤 경로로 집 안까지 들어오는지는 정말 미스터리했다. 또 한 번은 잠을 잘 때였다. 내 몸으로 무언가 기어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본능적으로 허벅지에 올라타 있는 벌레를 손으로 "탁!!" 잡았다. 그런데 일단 손에 느껴지는 그 크기가 묵직했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 집에 불을 켰다. 그런데 바퀴벌레의 크기가 어찌나 큰지 조금 과장을 보태면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나도 놀랐지만 잡힌 바퀴벌레도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집주인은 방역을 한다고는 하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응암동 옥탑의 가장 큰 단점은 내가 살고 있는 집 옆으로 다른 건축물도 있었는데 이게 불법건축물로 신고가 되어서 집주인이 낮이면 하루종일 공사를 했다. 나는 집에서 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오래 걸리지 않아 집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이 나갈 때 나에게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갈등의 골이 깊어서 빨리 집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때는 나는 드라마 4 작품 정도를 끝내고 독립해서 녹음기사로 입봉을 준비하고 있었다. 드라마를 시작한 지 1년 반 정도가 흐른 시점이었다. 나는 조금 더 밖으로 빠져 일산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다시 일산>

응암동에 살면서 너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는 좁은 월세집으로 옮기고 너무 행복해졌다. 항상 예민하게 지냈는데 다시 마음의 평화를 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집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일들을 겪었지만 그 많은 실패의 시간이 합쳐져서 조금은 좋은 방을 구하는 노하우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층간소음으로 인한 범죄를 뉴스에서 쉽게 보고는 한다. 물론 그들의 범죄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밖에서 하루종일 고생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휴식한다. 그런 집 마저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가끔 아침에 출근을 할 때 집과 이야기를 한다. "밤사이 나에게 잠 잘 곳을 주어서 고마워"하고 말이다. 법정스님의 말처럼 마음이 열려있다면 얼마든지 집과 대화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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