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사건은 살리고 작품과 인물을 특정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않기 위해 작품과 인물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삼갑니다. 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드려 죄송합니다.*
<연출부로>
나는 체리피디님이 소개를 시켜준 연출부 일을 했다. 작품은 특수효과와 CG가 특히 많은 영화였다. 이런 작품에서 연출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연출부는 다른 팀 간에 소통창구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품에 참여하면서 연출부로서 내 한계를 느꼈다. 나는 사회성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소통적인 부분에서 역할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작품을 마치고 27살이 되어있었다.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기 전에 나는 조금 더 연출부로 작품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작품 1, 무엇을 위한 회의인가>
또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에 참여했다. 감독님은 당시에 꽤나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영화에 참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님과 스텝들이 모이는 회의가 예정되었다. 나는 책과 영화를 골라 보고 회의 때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고민을 했다. 연출, 제작 스텝들은 감독님이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회의를 준비했다. 감독님은 다른 일정으로 회의시간이 한참 지나고 도착했다. 스텝들은 감독님이 도착하자 서둘러 회의실로 모였다. 감독님은 배가 고프다고 그 자리에 김밥과 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회의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작 회의가 시작되자 무엇을 위한 회의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스텝들은 그냥 감독의 비위를 맞추고 쓸모없는 이야기들만 했다. 나는 무척이나 실망을 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감독이 먹다 남긴 김밥과 라면을 치웠다. "아 이건 아니다." 나는 너무 불길한 촉을 느꼈다. 그리고 내 느낌에 확신을 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조감독님에게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다. 조감독님은 조금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회의를 하면서 느꼈던 느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생각하고, 의심한 것들에 기름 부었을 뿐이다. 나는 다시 백수로 돌아갔다. 촬영장의 소식을 가끔 들을 수 있었는데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문제점들은 더 드러났고 조감독님도 촬영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나왔다고 한다. 나는 계속 다음 작품을 찾고 있었다.
<작품 2, 떠나지 않는 가난>
다음 작품은 법정영화인데 친한 조감독님이 준비를 하는 작품이었다. 촬영이 들어가려면 1~2달이 남았다. 하지만 내 통장의 크기가 그 시간을 버텨 줄지는 미지수였다. 영화일을 하는 동안 가난만큼은 내 곁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벌어놓은 돈들은 작품을 기다리는 동안 다 써버렸다. 딱히 사치를 해본 경험도 없는데 말이다. 배가 고프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저금통의 배를 가르는 일이다. 나는 궁지에 몰려 저금통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집 앞에 있는 빵집에서 저렴한 빵을 사 먹으며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했다. 돈 나올 데가 없을 때 다음에 하는 행동은 중고 물품을 파는 일이다. 나는 중고 마켓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값나가는 것을 팔았다. 태블릿 피씨였다. 형에게 선물 받은 것이라 파는 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곧 구매자의 연락이 왔다. 약속시간에 만난 구매자는 자리에서 가격 흥정을 했다. 표정을 보니 그냥 떠보는 말이었고 나는 원래의 가격을 밀어붙였다. 다행히 구매자는 못 이기는 척 태블릿을 구매했다. 당시 내 통장에 잔액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중고거래가 이루어지고 나는 그 자리에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가족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이런 생활을 이해해 줄 부모는 아무도 없다. 나는 영화가 촬영에 들어가는 날만을 기다리며 버텼다. 1~2달 안에 들어간다던 영화는 3~4개월로 밀리고 6개월, 8~9개월 그리고 1년을 기다리기에 이르렀다. 나는 혼자서 공부하고 글을 쓰는 것 말고 다른 일이 없었다. 처음에 너무 두꺼웠던 책이 겉지와 속지가 분리되어 종이가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 책의 작가가 내 모습을 봤으면 아마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심각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져있었다. 집은 내 마음을 반영하듯 정리가 되지 않고 쓰레기통이 되어갔다. 가끔 광고녹음 일을 나가며 아슬아슬하게 입에 풀칠을 했다.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돈이 들어와도 무서운 속도로 공과금부터 빠져나갔다.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주인이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정말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나는 1년을 넘게 기다리고 조감독님을 통해서 작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애써 조감독님을 위로했다. 애초에 제작사에서는 조감독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스스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화를 낼 시간도 없었다. 이젠 더 이상 팔 중고 물건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에게 스텝이란 얼마든지 쉽게 부품을 갈아 넣듯이 갈아 치워 질 수 있는 것인 듯 보인다.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남는 건 시간뿐이라 하루종일 영화를 보았다. 하루에 5~6편의 영화를 한 달 동안 집을 나가지 않고 보았다. 하지만 내 영혼에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너는 재능이 없어" "멍청한 놈 네가 뭐 대단한 능력이나 있어?" "한심한 놈"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괴롭혔다. 어둠의 끝자락 이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20대의 마지막 해라 머릿속에 생각은 더욱 복잡했다. "나도 이제 곧 30살이야 이제 어떻게 살아갈 거야?" 답이 없는 고민을 하면서 동내를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에 다리 하나가 없는 고양이가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나는 꼭 고양이가 내 모습과 같았다. 어디서 엉망으로 싸우고 음식을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 나는 얼른 고양이가 먹을 것을 사서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고양이는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오늘은 또 어디서 추운 밤을 보낼지 마음이 쓰였다.
<피자트럭 아저씨>
어느 날 동내에 트럭에서 피자를 파는 아저씨가 보였다. 주머니에 얼마 돈이 없기는 했지만 피자 한판 사 먹는다고 내 인생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처음 보는 피자아저씨에게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아저씨는 자신도 처음부터 트럭에서 피자를 판 것을 아니라고 하셨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 "안 좋은 날이 있으면 좋은 날도 있다" 피자 아저씨는 따뜻한 피자를 건네어주고 마지막까지 좋은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적당히 싸워서 지지 마” 나는 피자를 들고 집으로 갔다. 나는 싸우는 방법조차 잊어버렸다. 아니 애초에 나는 무엇과 치열하게 싸워본 적이 있었나?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거지? 곧 추석명절이 오고 있었다. 20대의 마지막 명절이다. 나는 일단 고향에 내려갈지 말지를 판단하기 위해 통장에 잔고를 확인했다. 통장에 20만 원이 남아 있었다. 8년 동안 스텝으로 일을 해 왔지만 처음 고시원을 잡을 때처럼 내 통장에는 20만 원이 남아 있었다. 군대에서 전역할 때 20만 원으로 시작했지만 용기는 가득했다. 하지만 30살이 가까워진 시점에 내 통장에는 똑같이 20만 원만 남아 있었다. "중요한 건 나는 용기를 잃어버렸다." 가족에게 힘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끝까지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나는 명절 기차에 올라서 집으로 출발했다.
<나이 서른에 우린>
집으로 도착해서 나는 다시 부모님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얼굴에 우울감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아버지는 평생을 소방공무원으로 일을 하며 살아오셨다. 나처럼 사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누군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내년이면 이제 30이다. 그제 그만하는 것이 어떻겠냐?” 평소와 똑같이 말을 했다. 중요한 건 이젠 나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 나의 주식은 편의점 김밥이었다. 나는 편의점 아주머니가 곤궁한 내 모습을 보고 유통기한 지난 김밥을 친절하게 챙겨준 일을 기억하고 있다. 집으로 내려와서 나는 오랜만에 엄마가 챙겨주는 따뜻한 밥을 먹었다. 엄마는 항상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는 나에게 "옷을 사러 가자" 말을 했다. 나는 엄마를 따라서 같이 옷을 사러 나갔다. 나는 뭐 대단한 성공은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옷을 사 드릴 수 없는 내 처지가 너무 초라했다. 나는 “엄마는 사고 싶은 옷 없어?” 물었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속 내 통장에 남아 있는 금액을 생각했다. 얼마 하지 않는 저렴한 옷들인데 나는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엄마는 극구 자신의 옷을 사는 것을 사양했다. 그 순간 느끼는 내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무언가 일이 크게 잘 못 되어가고 있다. 내가 부모님의 옷을 사 드리고 가끔은 용돈도 드릴 나이인데 우리 부모님은 내 욕심 때문에 그런 작은 행복감도 느끼지 못하는구나. 엄마와 나는 내가 입을 후드티만 사서 나왔다. 이 날은 마음이 정말 아픈 날이었다. 하지만 이 날의 일은 내 가치관의 순서를 바꾸었다. 난 돈을 목적으로 영화일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돈이 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서울로>
나는 다시 마음을 잡았다.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면 나는 다시 바보가 되고 만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뜻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고자 하면 어려움이 있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는 서울로 올라가서 드라마 녹음팀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올라가기 전에 아버지 등이라도 밀어드리고자 같이 목욕탕으로 갔다. 경상도 남자들은 대부분 따뜻한 말이라고는 주고받을 줄 모른다. 목욕탕이라도 따라가면 다행이다. 아빠는 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못 마땅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빠를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나쁜 일을 하며 살지는 않겠습니다”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아버지에게 내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은 그것뿐이었다. 아빠는 그저 황당할 뿐일 것이다. 나는 엄마가 사 준 옷을 입고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열차로 올랐다. 나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일이 이렇게 힘든데 그동안 어머니 아버지가 지킨 가정의 평화야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다. 아버지 어머니는 형과 나를 키우는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어릴 때 부모님은 코 풀 때는 옆에서 "흐응~!!" 쉬할 때는 "쉬이~~" 항상 응원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항상 뒤에는 부모님이 있었다. 멀리 있어서 내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뿐이다. 나는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약속한 드라마 녹음팀 면접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