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사건은 살리고 작품과 인물을 특정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않기 위해 작품과 인물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삼갑니다. 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드려 죄송합니다.*
<녹음팀의 시작>
나는 30살이 되어 처음 드라마 녹음팀으로 일을 시작을 했다. 하지만 녹음팀의 시작을 이야기하자면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내가 조명팀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같이 작품을 하고 있던 녹음팀 형과 친하게 지내었다. 마이크를 드는 붐 오퍼레이터 형은 유자형으로 부르겠다. 당시에 유자형은 작품이 끝이 나면 녹음기사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 번은 회식자리에서 유자형 옆에 앉았는데 유자형은 잘 구워진 고기를 먼저 내 입에 넣어주었다. 유자형은 자신의 자리가 이제 공석이 되니 녹음팀에 관심이 있으면 나를 녹음기사님에게 추천해 주겠다고 말을 했다. 나는 영화의 다양한 파트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고민 끝에 작품을 마치고 녹음팀으로 다음 작품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내가 배운 것은 누가 입에 친절히 고기를 넣어준다면 항상 경계하라는 것이다.
<동시녹음팀>
녹음팀은 보통 녹음기사, 붐 오퍼레이터 (붐맨) 라인맨 (유틸리티 맨) 3명으로 구성이 된다. 녹음기사는 화면에 필요한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장비를 세팅하고 녹음파일을 저장, 관리하는 사람이다. 붐 오퍼레이터는 화면에 필요한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배우 동선과 카메라 앵글 사이즈에 맞추어 마이크 드는 사람이다. 라인맨은 마이크를 따라다니며 녹음기와 마이크를 연결하는 라인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예전에는 무선장비를 흔하게 쓰지 않았기 때문에 라인맨이라 부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무선장비가 흔하게 보급되면서 라인맨을 유틸리티 맨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예전에 비하면 드라마 혹은 영화를 제작하는 예산이 커지면서 서브붐(세컨드 붐맨)을 많이 이용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일도 변했다. 보통 라인맨으로 경력이 조금씩 쌓이고 마이크를 드는 일이 흔한 경우이지만 내가 녹음팀으로 일을 시작할 때 녹음기사님은 붐 오퍼레이터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따로 라인맨 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마이크를 들었다. 상업영화에서 이런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녹음기사님도 일찍 동시녹음기사로 데뷔를 해서 붐맨으로 경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를 붐맨으로 쓰는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번에 붐 오퍼레이터의 일을 수행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추리영화>
나는 붐맨으로 작품에 참여하면서 라인맨으로 내 군대 친구를 데려갔다. 전에 나를 개미대장을 놀렸던 친구인데 이 친구는 우미라고 부르겠다. 영화는 일본 작가의 추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2011년에 여름동안 촬영이 진행되었다. 나는 간접적으로 전에 작품을 할 때 유자형이 마이크를 드는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마이크를 드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웠다. 첫 촬영은 마포구에 있는 동물병원에서 시작했다. 더운 여름이지만 보통 녹음때문에 에어컨을 끄고 촬영을 한다. 그리고 동물병원 앞에는 도로가 있어서 촬영을 할 때는 동물병원 안에 모든 창문을 닫고 촬영진행을 했다. 나는 마이크를 처음 든 날, 살면서 하루에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으로 기억한다. 마이크를 잘 들지 못했던 나는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했고 촬영감독님을 포함한 스텝들은 점점 짜증이 났다. 나는 솔직히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 같았다. 카메라 앵글을 보고 마이크를 드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고 마이크가 가야 하는 위치도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마이크는 주연배우만큼이나 자주 카메라에 모습을 비췄다. 촬영감독님도 그 당시에 좀 터프한 사람이었다. 촬영감독님은 엄청나게 화가 나서 촬영이 종료되자마자 피디님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디님은 굉장히 푸근한 인상이었는데 좋은 말로 촬영감독님을 다독인 모양이었다. 나는 정신을 더욱 바로 잡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면 내가 빨리 성장하는 방법밖에 없다. 녹음기사님은 그날 나를 횟집으로 데려가 해삼에 소주를 먹이면서 위로를 했다. 나는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다. 꿈에서도 나는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꿈에서 나는 촬영감독님 뒤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촬영감독님이 배우를 따라 앞으로 이동하는 무빙샷인데 나도 촬영감독님을 따라서 마이크를 들고 이동했다. 곧 멈춰서는 촬영감독님은 갑자기 180도를 돌아서 나를 찍기 시작했다. “야!!! 마이크 또 나왔어?! 제대로 안 하지?!!” “아니…. 이건 좀 억지… 촬영감독님!!! 으악!!! 죄송합니다!!!!” 나는 꿈에서 깨었다. 꿈이 나 스스로 생각하기도 어이가 없었고 자는 동안에도 마이크를 들었으니 아침에 개운할 리 없었다. 나는 또 촬영장으로 가서 마이크를 드는데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매우 피로하게 느껴졌다.
<응급실 입원>
몸이 말도 못 하게 피로하고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침에 오줌을 누는데 색깔이 개나리 보다 노랬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 몸이 확실히 잘못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내가 버틸 수 있는데 까지 버티면서 몸이 회복되기를 기대했다. 1주가 더 지나서 나는 몸과 눈마저 노랗게 변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도 확실히 아픈 사람으로 보이면서 병원을 찾게 되었다. 나는 촬영을 마치고 병원으로 갔는데 그 길로 바로 입원을 했다. 병명은 간염이었는데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틴 것이 병을 키웠고 간수치는 매우 높았다. 당시 간염이 유행이었고 전에 녹음기사님과 먹은 해삼과 소주가 문제였던 것 같다. 내가 입원을 하고 유자형이 급하게 촬영현장으로 내려와서 마이크를 드는 일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나이가 젊어서 회복이 빨랐다. 의사 선생님은 내려가는 간수치를 보고 안심을 했다. 힘들겠지만 빨리 나으려면 잘 먹어야 한다고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빨리 내가 있는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병원밥으로는 양이 모자르다 싶어서 밥을 먹고 병원 앞에 고깃집으로 가서 삼겹살을 시켜 먹었다. 병원복을 입고 혼자 고기를 먹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지만 나는 빨리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병원에서 틀어주는 예능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못 견뎌하는 나를 보고 의사 선생님은 나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의사 선생님은 아직 회복이 다 되지 않았으니 몸을 잘 관리하라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한 지 1주 만에 나는 다시 퇴원을 해서 촬영현장으로 돌아갔다. 현장으로 돌아왔는데 유자형이 같이 작품을 도와주기로 계약을 했다고 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한 작품을 하면서 유자형에게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자형은 녹음 외적으로도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다. 마이크를 드는 실력도 좋았지만 다른 스텝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배려해야 하는지 세심하게 배웠다. 나는 유자형의 도움을 받아서 작품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멜로영화>
추리영화가 끝이 나고 유자형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이어서 멜로 영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번 작품도 우미가 함께 했다. 이번에는 붐맨으로 멋지게 일을 해 내고 싶었다. 추리영화에서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붐맨으로 모자람이 많았다. 기사님의 말에 의하면 멜로영화 작품을 하는 동안 나에게 10년 동안 할 욕을 다 했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저러고도 같이 작품을 하는 것을 보면 참 애증이라는 말을 했다. 사실 나는 혼이 나면서도 기사님과 신뢰를 바탕으로 했다. 녹음기사님에게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장점이 있었다. 하루의 녹음결과물이 좋을 때도 혹은 나쁠 때도 있다. 우리는 동시녹음팀이다. 하루에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기사님은 일을 하는 동안에는 화를 잘 내었지만 그건 좋은 소리를 만들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님은 촬영을 마치면 일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촬영이 끝나면 보통 숙소방에 모여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그냥 사는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촬영현장에서 혼이 나는 것을 이해했지만 서로 오해가 깊어지거나 감정이 상하는 경우는 녹음기사와 붐맨 사이에서 흔하게 있는 일이다. 나는 이런 기사님의 장점을 새기고 절대 잊지 않았다. 기사님은 술을 참 좋아하셨다. 또 기사님이 좋아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담배였다. 녹음기 위에는 담배 한 보루가 올려져 있었다. 녹음을 하는 동안에는 기사님의 입에 항상 담배가 물려 있었다. 하루에 담배는 몇 갑씩 금방금방 사라졌고 오히려 담배가 보이지 않으면 내가 불안해져서 일에 집중을 잘 할수 없었다. 촬영장에 스텝들은 모두 모난 사람 없이 성격이 좋았다. 모여서 술도 자주 마셨는데 나는 그런 일들을 잘하지 못했다. 한 번은 촬영팀과 연출팀 형들이 나와 우미하고 술을 마시고자 자고 있는 방으로 쳐들어오는 일까지 있었다. 형들은 술을 마실 때도 재미있었지만 같이 일을 할 때도 참 재미있었다. 가끔 실수로 마이크를 손에서 놓칠 때 형들은 “기사님 못 봤어 빨리 주워!”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서로 간에 배려가 좋아서 촬영을 할 때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다. 다만 촬영이 늦어질 때, 형들은 불만이 튀어나왔는데 헤드폰으로 듣고 있는 연출감독님을 향해서 무언가 마이크에 대고 불평을 하려고 하면 나는 마이크를 들고 멀리 도망을 갔다. 2달 반이 걸려 우리는 촬영을 마무리했다. 겨울 동안 고생하며 찍은 영화는 개봉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나는 기사님과 같이 다음 작품을 준비했다.
<좀비영화>
다음 작품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조금 있어서 나는 다른 녹음기사님과 좀비영화에 참여했다. 워낙 저예산으로 만들어지는 영화고 스케줄은 무리하게 짜여 있었다. 두꺼운 좀비 분장을 하는 것도 고생스러운 일이지만 배우들은 정말 열정적으로 연기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배우들의 체력이 떨어지고 쉬는 동안은 기진맥진하다가 촬영을 할 때 다시 체력을 쥐어짜며 최선을 다 했다. 모든 스텝들도 최선을 다 해 촬영을 하였지만 24시간이 지나도 촬영할 씬들은 많았고 피로감으로 촬영속도는 점점 더디게 진행이 되었다. 제작자들은 촬영분량을 넘기지 않고 무리하게 촬영을 진행시켰다. 결국 사람을 희생시키기로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영화를 제작하는 분위기에서 딱히 어려운 선택도 아니고 당연하게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그래 누구 하나가 쓰러져야 끝이 나겠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누가 스텝이고 누가 배우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혹시 스텝이세요?
<아뇨... 저는 좀비 아!.. 아니 배우입니다.
>혹시 배우세요?
<아뇨... 저는 스텝입니다...
>...
우리는 36시간 정도 무리한 촬영을 하다가 세트장으로 들어가며 3시간 정도 휴식을 하고 이어서 촬영하기로 했다. 영화 촬영이 끝이 나고 "수고하셨습니다~" 감독이 말을 했지만 분위기는 너무 침울했다. 다들 화가 나 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교도소 영화>
다음 작품은 교도소에서 벌어지는 코미디 영화였다. 2012년 7월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은 교도소세트에서도 많은 했는데 카메라가 방 안을 찍고 있으면 나는 전혀 마이크를 들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촬영장 위에 설치되어 있는 작업대 위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들었다. 방 안에는 많은 배우들이 있었고 대사도 많아서 어려운 작업이었다. 비가 오는 장면, 불이 나는 장면, 힘든 장면들이 많았다. 나는 어떤 일을 하든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극도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격의 단점이라고 한다면 안 된다고 판단했을 때는 포기도 빠르다는 것이다. 녹음기사님이 판단하기에 소리가 좋지 않지만 현장에 마이크 위치는 최선인 경우가 있다. 붐맨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흔히 이럴 때 녹음기사들이 하는 실수가 붐맨을 쥐어짜는 것이다. "부족해! 더 좋은 소리를 가져와" 조금 더 마이크가 배우에게 가까이 가라고 계속 무전이 날아온다. 이미 마이크는 최선의 위치에 있는데 붐맨은 녹음기사님의 무전을 듣고 마이크를 조금 더 내려본다. 결국 화면에 마이크가 나타나 NG가 발생한다. 녹음기사님은 화면에 마이크를 넣은 붐맨을 무전으로 비난한다. 이것은 최악의 작업방식이다. 나는 내가 더 마이크를 잘 들면 기사님과 이런 점을 극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사님도 소리가 좋지 못할 때 계속해서 흔히 녹음기사들이 실수하듯이 붐맨을 쥐어짜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행동은 절벽 끝에서 애를 쓰고 있는 사람을 계속해서 뒤에서 미는 행동이다. 녹음기사님과 나와의 관계는 촬영이 진행이 될수록 그 골이 깊어졌다. 문제는 예전에는 이런 감정의 골이 생겨도 촬영이 끝나고 같이 술 한잔 하면서 풀었다는 것인데 점점 그런 자리도 줄어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나 스스로에게 문제점을 찾았기 때문에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더 잘하면 될 거라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나는 촬영이 막바지에 들어갈 때 더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녹음기사님은 나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술자리를 만들었지만 이때는 이미 상황이 너무 늦었다. 나는 기사님과 이번 작품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기사님은 알겠다고 말씀을 하셨고 남은 촬영기간 동안 내 마음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셨다. 기사님은 촬영이 끝나기 전에 다시 물었지만 나의 답은 같았다. 작품은 여름이 지나가고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려고 할 때 끝이 났다. 이 영화도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녹음기사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
나는 이후에도 여러 기사님들과 다양한 작품에서 녹음일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이후 나는 녹음기사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녹음기사는 데뷔를 하면서 다들 개인 장비를 구매하게 되는데 워낙 고가의 장비들이다 보니 좀 과하게 장비를 챙기는 녹음기사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장비를 살뜰하게 챙기면서 사람에 대한 소중함은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녹음기사는 같이 일을 하는 조수들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커피가 내 입으로 들어가기 전에 조수들의 것을 먼저 챙겨야 하고, 비씬에서 마이크를 들다가 홀딱 물을 뒤집어쓴 붐맨을 보면 장비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붐맨에게 수건을 챙겨주어야 한다. 쉽고 당연한 말 같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못 한 녹음기사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전기에 관한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급한 경우 무전기를 통해서 소통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녹음기사가 붐맨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녹음기사는 소리가 좋지 못하거나 더 좋은 소리를 요구할 때 무전을 한다. 붐맨의 귀에 인이어로 계속해서 무전이 들어가는데 결국 집중력이 흩트러지고 오히려 실수를 저지르게 만든다. 그 순간에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붐맨을 계속해서 밀어 넣어서는 안 된다. "같이 일을 하는 팀원을 믿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지 못 한 녹음기사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