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하기 전,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저출산대책이니 인구 감소로 인한 국가 위기와 같은 토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올해로 한국 나이로 서른다섯, 만 나이로 서른셋인 가임기 여성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미국에서 유학도 하고 대학 졸업 이후 주재원 생활로 타국에서 10년 넘게 보낸 후 돌아온 고국의 현실은 커리어에 대한 욕심이 큰 내게 커다란 절망의 땅 같았다. 여전히 21세기에도 유리천장이 공고하고 워킹맘으로 사는 삶은 본인의 강력한 의지 및 체력으로만으로 결코 가능하지 않는 이 나라는 조부모의 또 다른 희생이 없이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어 보였다.
여성의 인권이니 남녀 동등 대우 및 성별에 따른 임금격차 해소와 같은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너 페미야?'라는 질문을 받았고 '페미니즘'의 정의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차라리 침묵하는 편을 택했다. 상견례 자리에서조차 '아내는 남편을 하늘같이 모시고 남자가 빛날 수 있게 해야 하는 게 도리이다'라는 발언을 하는 친정아버지의 발언 앞에서 나 하나만 조용히 하면 모두가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우리나라는 0.7이라는 경이로운 출산율을 넘어서 이제 0.6이라는 세상에서 전무후무한 역대급 최저출산율을 목전에 두고 4월에 치러지는 총선을 위해 각 정당에서 저마다의 저출산 해결방법에 대한 정책들을 내놓지만,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것은 단순히 수중에 돈 몇 푼 쥐어준다고 해결될만한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30대 초중반, 가임기 여성들은 이직을 위해 면접자리에 가면 빼놓지 않고 듣게 되는 질문들이 있다. '결혼 계획은 있나요? 아이는요?' 아무리 결혼을 하고 싶은 기혼주의자이고 아이를 사랑하는 잠재적 엄마가 되고 싶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면접관이 듣고자 하는 모범답안인 '남자친구도 없고 결혼계획도 없습니다. 비혼주의자입니다.'와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학력을 증명하는 졸업증명서나 이전 직장에서의 연봉 등을 증명하는 원천징수 영수증과 함께 산부인과에서 다낭성 등으로 임신이 어려울 수 있다는 난임성 자궁상태를 증명하는 의사소견서를 제출하면 입사 시 가점을 받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대기업 이직에 합격한 누군가는 입사 후 2년간 임신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믿기 힘들겠지만 2023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실제로 그러했다. 해당 내용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도 서약서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나는 헤드헌터들로부터 여전히 일주일에 네 통 이상 이직제안을 받는 초기 임산부이다. 그들은 번지르르한 나의 레쥬메와 경력, 연봉을 보고 먹음직한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꾼들처럼 다양한 회사의 IR 또는 해외파견 포지션 등을 제안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저 임신 9주 차입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 네 알겠습니다'를 반복한다.
금융위 부위원장이니 베트남 중앙은행장과 같은 사람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영어로 회사 소개를 하고 라오스 중앙은행과 만나 비즈니스 미팅을 진행하고 라오스 최고 국영은행장님을 만나서 우리 회사 대표, 부대표님과 함께 미팅을 하고 밤낮 야근해 가며 마케팅실무를 담당하는 1년 7개월을 보냈다.
네, 저 태이가 바로 이 글을 쓰는 이 태이입니다.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던 K-직장인의 현실에 절망해 사직서를 제출한 지 3개월. 이직의 부푼 꿈을 안고 총 네 군데의 회사에 최종면접 자리까지 갔어도 나는 현재 실업자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타래에서 확인해주세요.)
일욕심 많고 커리어우먼을 꿈꾸던 내가 집에서 노는 것은 개인의 경력관리 차원에서도 아쉽고 안타깝지만 한창 현역으로 빠릿빠릿하게 일 잘할 연차의 일꾼이 사회에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아주 큰 낭비이다.
2015년에 대리로 시작해 팀장, 과장 및 법인장 대행 역할 등을 거쳐 어느덧 9년 차 짬밥이 되었고 스무 살 때부터 영어강사, 로이터통신 기자, 버슨마스텔러나 웨버샌드윅과 같은 외국계 PR회사, tbs efm리포터, 위시컴퍼니 온라인 마케팅 등 대학 졸업 전 했던 경력들까지 합치면 도합 12년인 나의 커리어는 임신 사실 앞에서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목표는 사회적인 성공이나 커리어의 승승장구 같은 세속적인 지위뿐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또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 역시 소중하고 또 내가 원했던 것이기에.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희망하는 '평범한 삶'의 범주에 들어가기에, 나의 선택과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아쉬움이 남을 뿐... 일이야 뭐 애 낳고 경단녀로써 어떻게든 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직장에 다니지 못하는 공백기를 어떻게든 활용하려 과거 준비했던 미국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수업을 듣는 학원은 교대에 위치해 있다. 온라인 수업을 듣는 방법도 있지만 현장감을 느끼고 같이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과 스터디를 하러 오프라인 수업도 듣고자 했는데, 신혼집인 수원에서 통학하는 길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임산부 초기는 티가 잘 나지 않아 임산부 배지를 달고 지하철을 타는데, 나는 임산부배려석이 비어있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대부분 해당 좌석에는 아주머니들이 앉아계시고, 난 그 앞에 서서 가방에 매달린 임산부 배지를 열심히 흔들어대도 그들은 배지를 보고서도 시선을 피하고 스마트폰을 하며 끝까지 자리에 앉아계신다. 애초에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해 줄 분들 같으면 그 자리에 앉지 않았을 터. 그녀들도 각자 사정이 있겠지만 한 때는 본인들도 임신을 해본 경험이 있는 아주머니들께서 과거에 힘들었던 입덧이나 극심한 피로감 따위는 다 잊어버리신 듯하다. 서있는 것조차 힘든 눈앞 임산부들의 상황은 그들에게 중요한 게 아닐 테다. 당장 편하게 본인 두 다리 뻗고 앉아 가는 게 중요하고 스마트폰 안에서 편히 보는 유튜브 영상이 더 재미있으시겠지.
입덧이 심해 제대로 먹은 것도 없고 기력이 달려 예전과 같은 괄괄한 성격을 과시할 수도 없는 힘없는 임신 9주 차 임산 부린 내게는 그녀들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말할 힘조차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나만 조용하면, 나만 좀 힘들면, 모두가 평화롭다.
아니, 사실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니다. 내 뱃속의 아이도 힘들다. 엄마가 힘들면 아이 역시 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느낄 텐데.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못난 엄마라서 미안해.
대중교통을 피해 택시를 타면 택시 아저씨들의 담배쩐내가 날 공격하고... 자차를 이용할라 치면... 나라에서 임신하면 자동차 사주는 것도 아니고. 사실 뭐 자동차가 무슨 몇백이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 무튼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나라 저출산 대책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거지 같은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기업들의 임산부를 대하는 태도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라에서 돈 몇 푼 쥐어준다고 똑똑한 여성들이 옳다쿠나! 하고 애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내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이 땅에서 여성으로 자라나면 남성중심적인 대한민국 땅에서 너무나 힘들고 고생할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정말 재미있게 읽은 '대한민국 여군입니다'에서 가슴을 울렸던 몇 가지 구절들. 나 역시 군대문화가 강한 남초 회사에서 소수의 여성으로 살아남으며 비슷한 애로사항을 많이 겪었기에, 격한 공감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겼다.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살기 편한 환경이 된 것은 맞다. 이를 위해서 수많은 여성 선배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욕을 먹고 여자라는 이유로 주요 보직에서 배제되고 여자라는 이유로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우리가 여자라서 받는 이점도 없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받은 혜택이 1이라면 이를 위해 감수해야 했던 불편함은 10000 정도랄까...?
나중에 태어날 우리 아이가 말귀를 알아먹고 학교에 갈 시점이 되면 젠더감수성을 가장 우선적으로 심어주고 싶다. 이퀄리즘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논리 말고, 남녀를 떠나 인간은 개개인으로써 기본적인 권리가 있으며 본인이 타고난 성별 때문에 무엇을 해서는 안되고 무엇을 할 수 없다는 제한을 두고 싶지 않다. 남자아이로 태어나도 인형과 핑크색을 좋아할 수 있고, 여자아이로 태어나도 총과 로봇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내 뱃속의 알라에게 물려줄 것이 많진 않고... 알라딘 플래티넘 멤버십 혜택은 공유할 수 있다 애기야. ㅎㅎㅎ 건강하게 태어나서 얼른 엄마랑 책 읽고 또 아빠랑 신나게 뛰어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