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토 가나에 <고백> 서평
(*) 스포주의
마나미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우리 반 학생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학기 마지막 종업식 날, 중학교 과학교사인 모리구치 유코의 담담한 고백으로 시작된다. 지나온 자신의 삶과 아이를 학교에 데려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던 그녀는 사실 자신의 딸이 사고가 아닌 살해를 당했으며, 그 범인이 이 반 학생 중에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그녀가 모든 진상을 알게 된 후 선택한 섬뜩한 처벌 방법을 고백하며 학생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이후 미즈키, 나오키의 누나, 나오키, 슈아 순으로 고백의 화자가 바뀌어가면서 극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을 감히 무엇에 비할 수 있으랴. 하나뿐인 아이를 잃은, 심지어 자신이 지도 중인 학생들에게 아이를 살해당한 모리구치 유코의 슬픔과 좌절, 비통함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게다가 그 살인자들이 너무 어려 제대로 된 법의 심판도 받을 수 없다면...
유코는 미나미의 죽음을 통해 자기 자신이 다치거나 죽는 것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고통임을 알았다. 그래서 두 살인자 나오키와 슈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대신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도록, 자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기로 결심한다.
역시 아무리 잔인한 범죄자라도 제재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결코 범죄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재는 평범한 사람들의 착각과 폭주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약 유코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지, 어떤 짓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로남불인지 모르겠으나)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유코의 복수방법이 통쾌하다기보단 다소 기괴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분명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돌려준 것 같긴 한데,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상처 입거나 죽었다. 미즈키와 나오키의 가족들, 슈아의 엄마, 슈아의 엄마가 근무하는 연구실 사람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나오키와 슈아의 엄마는 자식을 잘못 키운 죄가 무겁다고 할 수 있으나, 미즈키와 나오키의 누나, 연구실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방법을 통해 나오키와 슈아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후회하거나 뉘우쳤을까? 아니, 나는 그들이 분노에 사로잡혀 더 끔찍한 괴물이 되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복수를 통해 유코는 더 편해졌을까? 이것도 글쎄...
이런 류의 소설이나 영화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결국 두 가지 생각에 부딪히게 된다.
1. 사이코패스의 기질은 타고나는 것인가.
2. 소년범에 대한 처벌은 갱생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가 - 애초에 갱생이 가능한가?
예전에 2년 정도 정심산업정보학교라는 여자소년원에 경제교육 봉사를 다닌 적이 있다. 회사 봉사 동호회에서 지원자를 모집하기에 사실 호기심 섞인 마음에 무작정 신청을 하긴 했는데, 막상 수업을 가려니 두려움과 거부감이 커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저 막막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또래들에 비해 학습 수준이 많이 떨어질 뿐) 영락없는 그 나이대 아이들처럼 느껴져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엉뚱한 질문을 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깔깔 웃어대는 그런 여중고생들.
몇 달에 한 번씩 방문을 하다 보니 정이 드는 아이들이 생겼고, 유독 마음이 쓰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너같이 예쁜 애가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된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뻔한 적도 있었다. 종종 쉬는 시간에 나에게 다가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아이들을 보면서, 주위에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만한 따뜻한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참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변호사인 친구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내가 다니는 장기소년원에 수감되려면 소년재판에서 가장 강력한 처벌인 10호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 같은 죄를 수없이 저지른 상습범이거나, 집단 특수폭행의 주동자, 살인, 방화, 강간 정도의 죄질은 되어야 10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볍게 기사로 접하는 사건들은 웬만하면 10호가 나오지 않는단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누군가에게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준, 각종 소년범죄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사건의 주인공들이 바로 이 아이들이라는 것이었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악질의 범죄자로 나오는 백성우는 9살 아이를 살해한 한예은의 공범으로 10호 처분을 받는다. 또 다른 화에서는 보호소에서 단체로 탈출을 감행하여 공동폭행 및 폭행치상, 미성년자 성착취와 협박 등의 죄를 저지르는 아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에게는 대부분 6호 처분이 내려진다(주동자인 최영나만 10호 처분을 받음). 10호는 이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이 아이들은 모두 인두겁을 쓴 악마나 다름없다는 것이 아닌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매일 밤 가슴이 찢기는 고통에 시달릴 텐데,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이 아이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맘 편히 웃고 있을 수 있을까.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이 갑자기 징그럽게 느껴지며 이질감이 들기도 했고, 함부로 내가 아이들을 동정하거나 불쌍히 여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또 아이들이 처한 안타까운 상황과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아려와 너무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 아이들은 애초에 악마로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악마로 길러진 것일까. 얼마 전 다른 모임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 사이코패스의 가정환경을 조사해 보니 흥미롭게도 일란성 쌍둥이였고, 갓난아기 시절에 각자 다른 집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이코패스는 입양된 후 양아버지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당한 전력이 있었지만, 다른 쌍둥이형제는 화목한 가정에 입양된 후 너무도 평범하고 따뜻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마다의 타고난 기질을 아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수많은 사례가 보여주듯, 결국 한 인간을 사이코패스로 혹은 인간으로 살게 만드는 데에는 환경적인 요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내가 만난 아이들 역시 대부분 가정형편이 많이 어렵거나, 가정에서 학대를 당했거나, 고아원 출신이었다. 중고등학생이지만 놀랍게도, 내가 비슷한 시기에 교육봉사로 가르쳤던 사립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보다 학습 수준이 훨씬 떨어졌다. 어떤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간단한 사칙연산조차 힘겨워했다. 이 아이들이 어릴 적 조금 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오키나 슈아도 조금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나쁜 환경에 놓인다고 해서 모두가 나오키나 슈아처럼 악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철부지 선생님 사쿠라노미야처럼, 환경을 극복해 내고 많은 이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결국 범죄를 선택한 것도, 그러한 인생을 그려낸 것도 모두 아이들의 선택이었다. 감히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삶에 서사를 주고 함부로 동정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건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건 악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그리고 그 악마들로 인해 상처받게 된 또 다른 아이들이 너무도 안타까울 뿐이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보호자 전원에게도 보호자교육을 명합니다....(중략)...
소년은 결코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 오늘 처분은 소년에게 내려졌지만, 그 처분의 무게는 보호자들도 함께 느끼셔야 할 겁니다.
(드라마 '소년심판' 中)
이 책을 읽으며 한 인간을 무사히, 또 올바르게 키워내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아이는 똑똑하지 않더라도 평범하고 건강하게, 바르고 착하게만 자랐으면 좋겠다는 모든 부모의 바람이 소박한 것이 아니라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새삼 느꼈다. 아이를 품고 있는 예비 엄마이기에 이 책을 읽으며 '만약 나 중에 내 아이가...'로 시작되는 끔찍한 상상을 시작하면 한없이 괴로워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점점 더 성숙하고 영악해지는데, 법과 제도는 아이들의 성장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촉법소년 연령 기준을 하향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시설확충과 인프라 구축을 비롯해 현행 제도의 전반적인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아이들은 결국 아이들이기에, 아이들을 바르게 키워내지 못한 어른들과 사회가 함께 죄를 짊어지어야만 할 것이다. 한번 버려졌던 아이들을 악마라고만 손가락질하며 사회와 영원히 격리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아이들이 더 끔찍한 악마가 되도록 방조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를 더욱 위험과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아닐까. 결국 우리는 아이들이 다시금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내야만 한다.
더 많은 아이들을 보호하고, 우리 사회를 더욱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사회구성원 모두의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덧)
상습절도로 수감된 한 여자아이가 이곳에서 나간 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자기도 회계사가 될 수 있느냐고 제게 물었었는데요.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죄를 뉘우치고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저의 바람이 어찌해서 동화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발제문] by SJY
1. 책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유코, 슈야, 나오키, 슈야와 나오키 어머니, 베르테르, 반장 등) 그리고 각각의 인물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게 되는데요. 작가는 챕터를 이어가면서 하나씩 그 이유를 풀어갑니다. 독자로서 느끼기에 가장 안타까웠거나 슬펐거나, 또는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어떤 것이었는지 공유해 주세요.
2. 범죄를 저지른 두 명의 아이 [슈야]와 [나오키]. 이 둘은 매우 다른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지만, 결핍과 욕구라는 측면에서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을 살인이라는 범죄까지 이끌게 된 강력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3. " 경찰에 진상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A와 B의 처벌을 법에 맡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살의는 있었지만 직접 죽이지는 않은 A. 살의는 없었지만 직접 죽이게 된 B. 경찰에 출두시켜도 둘 다 시설에 들어가기는커녕 보호관찰 처분, 사실상의 무죄방면이 될게 뻔합니다"
교사 유코는 딸 마나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반 아이들을 법의 심판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처벌하기로 합니다. 처벌은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극도의 심리적 압박을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1) 유코의 이러한 복수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 (복수의 방식을 막론하고) 스스로 벌을 내리겠다는 유코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4. 같은 반 학생들은 범죄자 슈야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고 무자비하게 비난하고 괴롭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범죄를 저지른 나쁜 놈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마땅하다'는 인식을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학생들의 태도는 어떻게 보시나요? 우리 사회에서도 '악인'을 두고 펼쳐지는 2차 처벌이 종종 일어나는데요. 그러한 사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5. ‘촉법소년’은 형벌을 받을 범법행위를 한 만 10세 이상∼14세 미만의 형사미성년자로, 형법 제9조는 ‘14세가 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형사책임능력이 없기 때문에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더라도 형사처벌을 하지 않고, 가정법원이 소년원으로 보내거나 보호관찰을 받게 하는 등 ‘보호처분’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촉법소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6.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무게는 똑같을까요? 사회에 해악을 끼친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 보호 측면에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인지.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