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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서평

by 책 읽는 라푼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33년 전, 1992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우리 독서모임의 막내멤버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선택적 낙태가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였다. 1990년의 남녀성비는 116.5(여성 100 대비)로 자연적인 남녀성비(105)를 훌쩍 뛰어넘었고, 심지어 셋째아 이상의 경우는 189.3, 대구광역시의 셋째아 이상 성비는 392.2라는 믿을 수 없는 수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비불균형은 놀랍게도 2000년대 초중반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2011년이 되어서야 자연적 수치인 105대를 회복하게 되었다.

참고로 내가 태어난 1989년의 성비는 111.8, 이 책의 출간연도인 1992년의 성비는 113.6이다.


나 때(80-90년대)만 하더라도 집에서 아버지가 아무렇지 않게 가정폭력을 행하는 경우를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학교와 집에서의 체벌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귀밑 3cm의 엄격한 두발 규제나 치마 길이, 구두 착용 등의 복장규제도 지금의 학생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성차별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던 때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근 20년 간의 변화는 직접 몸으로 겪은 나조차도 그 속도에 놀랄 정도다.


그리고 그 시절에 태어나 삼십 대 초중반이 된 내 또래와 이십 대 후반의 후배들은 지금 유례없는 성별 갈등을 겪고 있다. 차별당하며 자라온 여성들은 피해의식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금이야 옥이야 자라온 남성들은 막상 까보니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 - 오히려 응당 자신의 몫이어야 할 것들을 빼앗긴다는 생각에 -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며 분노를 토해낸다. 군 복무 가산점 문제로 갑론을박하던 우리 대학시절은 그나마 고상했다. 지금의 젠더갈등은 말 그대로 매일매일이 전쟁터다. 집값 문제부터 결혼, 출생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와 결부되어 우리 삶에 전방위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혼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짓눌리고 억압받는 정신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과학이 있다면, 렌즈를 들이대고 분명히 찍어두어야 할 여성의 깊은 상흔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의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교묘하고 복합적이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그리하여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는 사회는 진정 옳지 않다.


몇 년 전 큰 반향을 일으켰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나 또한 잊고 있었던 - 애써 덮어두었던 -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보게 되었다. 89년생 정소영에게는 명절연휴 집에서의 식사 순서, 초등학교 시절 남학생의 괴롭힘에 으레 따라오는 '걔가 너를 좋아해서 그래'라는 2차 가해, 여중 여고마다 꼭 한 명씩 있던 바바리맨, 대중교통에서의 만연했던 성추행, 회식자리에서의 성희롱 등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례들이 모두 마치 꼭 내 얘기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를 볼모 삼아 대중 남성들에게 화풀이를 한다거나 내가 피해자니 어떤 보상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고, 이제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에 앞으로의 잘못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기뻤다. 그와 같은 책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또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아이린, 설현 등이 이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밝힌 후 엄청난 악플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는 현실에 한숨이 나오기도 했지만, <82년생 김지영>의 진짜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동명의 영화를 보자며 내 손을 잡고 영화관으로 향해준 남편이 있어 행복했다.


그래서 강민주가 등장했다.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여자, 물살을 거스르며 하류에서 강의 상류로 나아가는 여자. 그런 주인공이 필요했다. 현실에는 없지만, 소설에서는, 소설이므로, 강민주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오랜 기간 상사의 성희롱과 성추행에 시달렸었다. 지면에 차마 담을 수 없는 온갖 성희롱은 물론이거니와 술자리에서 취한 척 손을 잡는다거나 허리를 감싼다거나 심한 경우 볼에 뽀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10여 년 전의 회계법인은 그러한 것들이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클라이언트 팀장을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서 젊은 여성인 내가 팀장의 옆자리에 앉는 것이 좋을지,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는 앞자리에 앉는 것이 좋을지로 회의(?)가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떠올려보니 새삼 참 추접스럽다...)


그러나 내가 가장 괴로웠던 때는 내가 성희롱을 당하던 때가 아니었다. 나를 괴롭히던 상사가 후배 회계사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였다. 나의 무능함과 안일함이 결국 후배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에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결혼 후 퇴사를 결심했을 때, '여자는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회사를 오래 다니지 못한다'는 선례를 내가 기필코 또 하나 만드는 것일까 봐 괴로웠다. 강민주를 꿈꾸지만 현실의 나는 강민주처럼 비상한 머리도, 으리으리한 빌딩도, 격투기 실력도 가지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늘 쪼그라들었다. 나도 피해자임에도, 나는 그냥 내 선택을 한 것임에도.


하지만, 10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여전히 고통받는 여성들은 어디에나 있겠지만, 조남주(82년생 김지영 작가)가 있고, 서지현(미투운동_검사)이 있고, 수많은 강민주가 있어서 세상은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가끔은 그녀들의 사연 많은 등에 매달려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죄스러울 때도 있지만, 또 가끔은 그녀들의 과한 주장이나 행동에 기함을 할 때도 있지만. 어쨌거나 확실한 건 그러한 사람들이 결국 잠들어있는 여성들을 깨워내고, 세상을 이토록 바꿔왔다는 것이다.


아직 뚜렷한 계획은 없지만 만약 내가 또 아이를 낳는다면, 나는 둘째도 딸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요즘에는 나뿐 아니라 내 주위 대부분 친구들이 (특히 첫째의 경우) 압도적인 비율로 딸을 선호하는 것 같다. 딸이 아들보다 살갑고 부모에게 더 힘이 되는 존재이기에 그러한 것도 당연히 있겠으나, 그만큼 우리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딸들이 꽤 살만한 세상'이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 아무리 딸이 예쁘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딸의 인생이 불행할 것으로 여겨진다면 누가 감히 딸을 낳고 싶어 하겠는가. 지금의 여아선호 풍조는 변화한 현실을 보여주는 가장 큰 반증일 것이다.


내 딸은 강민주가 되지 않기를, 아니 이 땅의 모든 딸들이 강민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땅의 모든 아들들이 백승하가 되지 않기를, 더 이상 그 어떤 강민주나 백승하도 필요 없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남자건 여자건, 좌건 우건,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이 땅의 강민주들이 모두 경멸 대신 사랑에 물들 수 있기를...


KakaoTalk_20251126_122445861.jpg 2025년 9월 23일, 마흔세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KHJ

1. 제목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금지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각자에게 ‘금지된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지도 이야기해 봅시다.


2. 강민주는 남성 지배주의와 그들의 폭력을 혐오·경멸하면서 동시에 폭력 앞에서 무기력하고 순응하는 여성들도 비난합니다.

“여자의 삶이 남자와 상관없이 독립적일 수는 없는가. 남자가 사라졌다 한들 자식까지 돌보지 못할 정도로 무너지는 일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나는 연약한 이 땅의 여자들에게 절망한다. 내가 벌이고 있는 남자들과의 전쟁에서 진정한 동성의 협력자를 얻는 일은 정녕 불가능한가. 어차피 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홀로 치르는 전쟁, 끝까지 혼자 가겠다는 내 결심은 더욱 굳어진다. “

납치극 또한 동성 여성들과의 연대 없이 자신을 신격화하며 홀로 진행하고, 오히려 폭력성을 대표하는 황남기와 공모하며, 인질이자 남성인 백승하에게 애틋한 감정까지 느끼는 모순을 보여주는데요. 저자가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요?

- 왜 강민주는 여성들과 연대하지 않았는지?
-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강민주의 영웅화였을까요, 혹은 더 큰 연대의 필요성일까요?


3. 소설에서는 외젠 이오네스코의 희곡 「수업」이 등장합니다. 백승하와 강민주는 이 연극의 대본을 함께 연습하고, 납치극의 결말마저 이 연극의 끝으로 맞춰질 정도로 중요한 장치로 쓰이는데요.

- 왜 작가는 ‘연극’을 등장시켰을까요?
- 왜 하필 「수업」이어야 했을까요?


4.1992년 출간된 이 소설은 당시 페미니즘 소설로 큰 논쟁을 일으켰고, 영화·연극화까지 진행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 당시엔 충격적이었을 납치 서사가 여전히 충격인가요?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지나요?
- 1990년대 초반과 지금의 여성 권리와 사회 구조는 얼마나 달라졌나요?


5.”이 소설은 말하자면 상처들로 무늬를 이룬 하나의 커다란 사진이다. 함께 들여다보면서, 서로 대립하지 않고, 각자 동등한 자리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데 유용하게 쓰여야 할 사진이다. 강민주의 테러가 잔인한 보복으로 끝나지 않고 가슴 더운 인간의 길로 접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가능하면 이 소설이 여성소설의 범주에서만 읽히지 않고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읽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진정한 예의라고 믿는다. - 작가의 말”

저자는 이 책이 여성소설의 범주로만 읽히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여러분은 이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로 읽었나요, 아니면 다른 시각으로 읽었나요?


6. 납치극이 강민주의 죽음으로 끝난 이후 함구하던 백승하는 3개월 만에 한 언론에서 입을 엽니다. 그의 인터뷰에서는 납치 사건과 강민주를 둘러싼 그간의 언론 보도에 대한 염증이 묻어납니다. 과연 어떤 기사들이 나왔을지, 헤드라인과 내용을 상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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