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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Feb 16. 2020

채식주의 할 수 있을까?

<육식의 성정치>와 <The Game Changer>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인성 기르기’다. 여태까지 생산성과 효율을 중시하며 살다 보니 나를 둘러싼 세상에는 크게 관심 두지 않았다. 새로운 10년 동안은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일환으로 몇 주 전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차별’에 관해 토론하는 독서모임을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토론한다는 것에 감명받았다. <육식의 성정치>라는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을 다룬 책을 읽고, <The Game Changers> 채식 다큐멘터리를 보고 토론하는 자리가 있어 참여를 준비하게 됐다. <육식의 성정치>는 정말 두껍고 두껍고 어렵고, 주말에 책을 읽다가 많이 낮잠에 들었다.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

책에서 말하는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의 공통점은 주된 권력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은 주류가 가지고 있는 특권(당연하게 지니고 있기에 존재하는 지조차 의식하기 어려운 힘)에 소외된 대상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사상이자 운동이다. 이러한 큰 맥락에서는 결을 함께 한다는 건 공감하지만, 저자는 보다 나아가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이 보다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고기와 여성은 소비된다.

<육식의 성정치>에서 하려는 주장은 성정치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구조화되는 방식이 우리가 동물, 특히 소비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연관된다는 사실이다. 가부장제는 인간/동물 관계 속에 내재돼 있는 젠더 체계다. 

동물은 생명이 아닌 어떠한 수단으로 소비된다. "동물은 어디서나 인간에게 속박돼 있지만 우리는 동물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동물'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동화책 속 코끼리, 토끼, 여우들처럼 숲 속 마을에 살고 있는 자유로운 생명체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동물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사육되고 있거나, 인간에게 보이기 위해 동물원에 갇혀있다. 심지어 자유롭다고 느껴지는 세렝게티 초원조차 국립공원으로 통제되고 있다. 이 세상에 인간에게 통제되지 않는 동물이 없다.

저자는 여성 또한 성적인 이미지로 또는 폭력에 희생되는 대상으로 소비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남성들이 공적 영역(고용과 정치)이나 사적 영역(하루 평균 네 명의 여성이 구타로 사망하는 미국의 가정)에서 여성보다 큰 권력을 행사한다."라고 말한다. 1990년에 쓰인 책이라 당시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했으리라.


고기와 여성은 함께 은유된다.

여성의 신체 일부로 비유되는 스테이크 하우스의 간판, 고기를 먹지 않는 남성이 여성처럼 연약할 것이라는 편견 등이 그렇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네덜란드 창녀들의 엉덩이처럼 탐스럽게 걸려있는 소시지들'이라는 표현을 읽었을 때 답답하면서 짜증이 난 적이 있다. 여성 작가가 쓴 책도 이런데, 수많은 고전문학은 더 그렇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몇몇 표현들 때문에 책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별로 와 닿지 않게 되어버렸다. 


사실 책을 읽으며 명확한 연결고리를 찾기는 힘들었다. 주류에 억압받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로 소외되기 때문이라고만 와 닿는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채식주의자 중에서 많은 수가 페미니스트였다."라는 연구 결과를 밝힌다. 연대해야 하기 때문에 이 두 사상을 묶어낸 것이고 그렇기에 채식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많은 건가 라는 추측이 든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Absent Reference(부재 지시 대상)

이 책의 여러 군데에 걸쳐 언급되는 개념이다. 대상을 은유하거나 또는 실제적 의미를 은폐함으로 그 본질에 대해 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고기'는 '도살된 죽은 동물의 살점'이라는 실제적 의미가 부재되어버린 단어이다. 우리가 식탁에서 마주하는 고기는 우리에게 그저 '고기'이거나 또는 살아있었던 '생명'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생명이 식탁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부재되어버린다. 그 고기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한 수단으로 호르몬을 주입받은 모체에게서 태어났으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성장호르몬을 주입받으며 자란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몸집이 커지면 도살장으로 끌려가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린 채 피를 흘리다 살점으로 분해된다. (아.. 쓰면서도 참 그렇다..) 

그러나 소름 돋게도 우리가 밥상에 앉아있을 때 보이는 고기는 그저 음식의 한 종류로만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러한 과정은 일반 대중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 뉴스에서 빽빽한 양조장만 보았지 실제로 그 동물들이 공장식 도살장에서 어떻게 분해되는지는 철저하게 부재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저 '고기'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이 책을 읽는 도중 고기를 먹는 상황마다 책의 내용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었다. 부재된 상황들을 인지했던 며칠간은 고기를 찾아먹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마다 만났던 고기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고, 익숙하게 망각해왔던 과정들 때문에 고기를 먹는 게 신기하게도 괜찮았다. 


The Game Changers

https://www.youtube.com/watch?v=iSpglxHTJVM

The Game Changers: 채식의 이점에 대해 밝힌 다큐멘터리

한편, <The Game Chagers>는 채식에 대한 다른 접근을 한다. 육식과 남성다움이 마케팅일 뿐이라고 말한다.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단백질은 모두 식물에서 섭취할 수 있으며, 세계 일류의 운동선수들은 채식으로 전향한 후 운동기능이 향상됐다. 고기는 그 중간의 매개체이며 오히려 신체에 암과 염증을 유발한다. 

로마의 검투사(글레디에이터)들의 화석 분석을 통해 그들이 채식을 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든 기네스를 세운 사람은 채식을 한다. 

<육식의 성정치>는 '쌀을 먹는 것이 여성을 믿는 것'이라는 메시지로 채식을 권유한다. 즉, 억압에 저항하는 것으로 페미니즘에 연대하기 위하여 채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The Game Changers>는 보다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한다. 채식을 하는 것이 우리의 몸에 더욱 적합하다고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고는 고기 먹기가 좀 그랬다. 책에서 여성은 동물에 대해서는 인간으로 주류의 입장에 서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비주류의 관점에 선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육식을 하는 페미니스트에 대해 모순적이라는 견해를 나타낸다. 


채식을 하는 페미니스트라. 아직은 내가 소화하기엔 너무나 버겁게 느껴진다. 아직 나의 수준은 남성이 남성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어릴 때부터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아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이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고정된 이미지로 조신하게 행동받기를 강요받는 사회가 아니기를 바란다. 성별에 상관없이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서 페미니즘을 위해 채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금의 억압은 아닐까. (이런 생각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어렵다.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


이제부터 어찌 됐던 채식을 하기로 노력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채식을 하겠다'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적지 못한 것은 100퍼센트 결심을 못했기 때문이다..) 결심이 선 건 <The Game Changers>에서 본 내용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존엄을 인정하고 다른 사상에 연대하자는 생각보다, 내 몸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작용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둘러싼 세계에 관심을 가지려고 시작은 했지만, 아직은 부단히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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