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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May 17. 2020

관계의 과학

통계물리학으로 바라본 세상

물리학자인 김범준 교수가 통계물리학의 관점으로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을 풀어낸 글이다. 책의 곳곳에는 물리학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의 흔적이 배어있다.


저자는 통계물리학이 관심 있어하는 주제들은 '많은 구성요소들이 모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할 때, 전체가 어떤 거시적인 특성을 새롭게 만들어내는지'라고 밝힌다.


작은 것들이 모여 새로운 현상을 창발한다는 것인데, 책에 개미의 사례가 나온다.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단일 개체로서의 개미와 인간은 단순한 행동을 하지만 많은 개체들이 모여 집단이 되었을 때는 복잡하고 놀라운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개미들이 적정 온도와 습도의 복잡한 개미집을 만들어 내는 것과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 복잡한 사회를 이뤘다는 것이 바로 그 결과다. 덕분에 개미와 인간 모두 지구에서 손꼽는 성공적인 개체로 살아남았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개미의 무게가 사람들의 무게와 거의 비슷하다고 하는데, 개미들도 참 성공한 개체인 것 같아서 놀랍다.


개미는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복잡한 사회를 일궈냈을까. 책에서는 개미의 단순한 알고리즘 덕분이라고 한다. 개미들이 최단 경로로 먹이에 도달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수학적인 계산을 통한 것이 아니라 페로몬을 이용해 단순한 판단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많은 개미들이 먹이를 가지고 돌아오고, 다른 개미들도 그들이 남긴 페로몬을 따라 먹이를 가져온다. 이때 최단경로는 왕복시간이 짧기 때문에 페로몬의 향기가 짙어지고 그곳으로 더 많은 개미들이 이동하여 최단경로가 선택되는 것이다. '페로몬을 따라 행동한다'라는 단순한 규칙인데도 다수가 모여 수학적 계산만큼 현명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책에서는 '페르마의 원리'를 통해 표현되는데 단순히 직선거리가 아닌 모래밭 + 매끄러운 길인 경우에는 오히려 직선거리가 불리하다. 개미는 페르마의 원리대로 굴절된 최단경로대로 이동한다. 놀랍다!)


개미들이 몸으로 뗏목을 만들어 이주하는 방식, 집을 짓는 방식 등에도 그들만의 단순한 알고리즘들이 담겨있다. 이러한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으로 시뮬레이션하면 비슷한 결과가 재현된다는 점도 재밌었다.

인상 깊었던 점은 개미들 중에서도 게으른 개미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전체 개미 중 부지런하게 일하는 개미가 30%라고 했을 때 70%는 게으름을 피운다. 그러나 부지런한 개미를 덜어냈을 때, 게으른 개미들이 부지런한 개미가 되어 다시 30%의 비율에 도달하게 된다. 게으른 개미를 뺐을 때는 충분한 부지런한 개미가 있기 때문에 변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고강도의 일을 위해 잉여인력을 비축해둘 수 있게 하며, 인력이 많아서 잡음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적당한 인원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다. 책을 읽고 개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놀라운 친구들.. 


또 재밌었던 점은 작가가 중력파를 검출하기 위해 파동을 상쇄시키는 원리에 대해 설명할 때 차은우와 자신의 사진을 합성하는 예시를 사용한 것이다. 중력파는 관측하기 어려울 만큼 미세하기 때문에 잡음들을 제거하기 위해 잡음을 필터링하는 것(퓨리에 변환)을 이용한다. 요즘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도 이어폰이 외부 소음을 녹음한 후 그 파형을 반대로 뒤집어 우리 귀에 들려주어 소음이 상쇄되는 것이다. 이를 이용한 재밌는 사진이 hybrid image인데, 두 개의 사진 중 하나는 긴 파장의 이미지를 남기고 하나는 짧은 파장의 이미지를 남긴다. 그러면 가까이서 보는 사진과 멀리서 보는 사진이 다르게 된다고 한다. 작가가 차은우 사진과 합성하여 '멀리서 보면 자신도 차은우'라고 한 점이 재밌었다. 


Hybrid image의 대표적인 예시 '아인슈타인 + 마릴린 먼로'. 가까이 보면 아인슈타인 멀리 보면 마릴린 먼로


책의 목차도 흥미로웠는데, 5가지 키워드(연결, 관계, 시선, 흐름, 미래)를 통해 세상의 여러 현상을 풀이한다. 


통계물리학은 생소한 분야였는데 이번 책을 읽고 보니, 가설에 대해 데이터를 기반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증명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았다. 사고 실험에서 더 나아가 데이터 기반의 시뮬레이션을 한다는 것이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다. 문득, 증명하기 위해 만드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들은 어떤 식으로 개발하는지 궁금해졌다. 


과학적 지식에 대한 딱딱한 묘사가 드문드문 있어 아쉬웠지만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서 즐겁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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