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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May 19. 2019

사랑, 찌질, 무기력

201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소설은 새로운 영감을 준다. 작가는 소설이라는 형태를 통해 자신의 인생과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작가의 정수 어린 사색이 한 점 한 점이 모여 만들어진 소설은 마치 미술관 같다. 독자가 미술관 속 작품을 하나하나 둘러보다 보면, 그중 몇 개의 장면에 멈춰서는 그 의미를 곱씹고  뜻밖의 영감을 마주한다.

나에게 좋은 소설이란 이렇다. 전체적인 구성이 흥미로운 것도 좋겠지만, 몇 가지 장면에서 작가의 독특한 사색이 느껴지는 소설도 좋다. 타인의 인생으로부터 깊은 사색을 빌려와 맛있게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처음으로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접했다. 젊은 작가들을 응원하기 위해 책 값이 반값인 점과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어떤 소설을 쓰고, 어떠한 소설들이 상을 받는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해서 한 권의 책으로 오롯이 엮어 나왔던 소설보다 더 좋았다고 말하긴 힘들다. 결말이 꼭 있어야 하겠느냐만, 끝이 모호하거나 의미를 모르겠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편 한 편 읽어가며 생각을 고쳐간 것은 작품집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꼭 무엇을 말해야 하냐는 작가들의 냉소와 무기력도 있었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중구난방 없이 풀어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 속 사색과 문장들은 내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한편, 퀴어 문학 작품이 2편 있었는데, 처음에는 내가 잘못 읽고 있는 건가 책장을 역순으로 몇 번이나 되돌아갔었다.
“그러니까, 를 사랑한다는 것이 맞는 거지?”라며 주인공들의 상황을 되짚어봐야 했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다. 상대가 누구든, 성별이 어쨌든, 중요하지 않다.
사랑의 감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솔하고, 그런 것을 가리지 않으니까.


벤치에 앉아 벌레를 쫓으며 샌드위치를 먹고 있으면, 내 또래의 부모들이 유모차를 끌며 잔디밭을 산책하고 있는 게 보였다.
.. 중략 ..
한참 동안 그 사소한 발걸음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내린 결론.
나는 이곳에 속해 있지 않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박상영


그런 순간이 있다. 평온한 일상 속에 문득, 내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이질감이 뼛속 깊이 서려오는 느낌 말이다. 화자는 실연을 당했고 보통의 남녀관계의 연애를 할 수 없기에 느꼈던 감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속해 있지 않다”는 느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나 사이에 형언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감돌 때, 회사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엄마가 생선 가시는 진짜 잘 발라줬는데...”
그가 갑자기 생선 가시를 바르기 시작하더니 두툼한 꽁치 살을 내 밥공기에 슥 얹어놓았다.
“아이고,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이고. 죄송해라.”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저도 좋아해요. 꽁치 맛있죠.”
“꽁치 말고. 당신이라는 우주를요.”
용암을 뒤집어쓴 폼페이의 연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주 무거운 것이 나를 덮쳤고 순식간에 세상이 멈춰버렸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박상영


당신이라는 우주를 좋아한다는 표현.

사랑 고백을 할 때 이보다 상대의 전부를 사랑한다는 표현의 대체제가 존재할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저런 고백을 받는다면 세상이, 우주가 멈춰버릴 법하다.


공을 가지고 하는 모든 게임들 중 축구가 가장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그건, 손을 쓰지 못하도록 한 축구의 룰 때문 아닐까. 손을 쓰지 않음으로써, 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인간만의 도구를 아예 무용지물로 만듦으로써 공은 진정한 생명력을 얻었다. 축구경기에서 공은, 오직 발과 지면의 온갖 굴곡들, 그날의 공기 밀도, 바람의 방향, 관중의 함성, 태양빛의 방향 같은 것들을 동력으로 움직이니까. 그러므로 어쩌면 축구는 인간의 스포츠가 아니라 공의 거대한 춤일지도 모른다.

<공의 기원> 김희선


축구를 공의 거대한 춤이라고 표현한 것, 손을 쓰지 않음으로써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듦으로써 공이 진정한 생명력을 얻었다는 표현이 흥미로웠다.
축구는 인간이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공이 인간의 발과 지구를 빌려 춤을 추는 것이라고 말한 점이 너무나도 인상 깊었다.


적어도 나에게 글쓰기는 분명히 괴로운 일이고, 늘 원고 앞에서 도망치듯 살고 있으면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 행위에서 행복감이나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다. 요즘 하는 생각은 어쩌면 글쓰기에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일까, 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나? 기쁨도, 슬픔도, 좌절도, 회환도... 이해와 오해, 광기와 환희, 희망의 전조와 종말의 전조까지 그 모든 것이 빈 원고지 안에, 그저 희기만 한 화면 안에 들어있다는 게. 그래서 어쨌든 좀 더 쓸 것 같다.

<우리들> 정영수 : 작가 노트 <내심 하는 생각들>


이 작가노트를 읽고, 나도 조금 더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흰 화면에 부담 없이 담아내 보고 싶다.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드러낸 날 것의 감정과 의미를 찾지 않는 써내림을 느끼곤, 작가라는 것에 대한 거리감이 훨씬 좁혀졌다.




나는 축음기에 레코드판을 갈아 끼우고 톤암을 내려놓았다. 숨이 멎을 듯한 고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불꽃 소리, 그리고 밀려드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선율.-
- 밀란 쿤테라 <웃음과 망각의 책> 198쪽

난 네게로부터 오는 편지가 선율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작은 불꽃도 아니라, 바로 그 고요라고 생각해.

나는 곡해하는 방법으로 오해하는 방법으로 이해하는 방법으로 한 번씩, 같은 재료를 다르게 요리하듯 그의 편지를 음미하곤 했다.

<데이 포 나이트> 김봉곤


화자에게 편지를 쓴 이는 밀란 쿤테라의 구절을 인용했다. 톤암을 내려놓고 작은 불꽃과 선율이 시작되기 전 숨이 멎을 듯한 그 짧은 고요. 당신의 편지가 그 고요 같다는 알듯 말듯한 표현과, 그 편지를 곡해하기도 오해하기도 이해하기도 하며 음미하는 화자의 모습이 신비로웠다. 두 사람 사이에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을 주고받는 경우를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데 말이다.


무언가를 더 알기 위해, 기억해 캐내기 위해, 혹여라도 이해하기 위해, 애써 또 하나의 필터를 만들어 내게 덧씌우고 싶지 않았다.

<데이 포 나이트> 김봉곤


헤어짐을 극복해나가는 이가 정말 ‘극복’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떠올린 생각이다. 지난 사람에 대해 더 알기 위해, 곱씹고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필터를 덧씌우고 기억을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마음이 마음대로 안되서 필터는 자꾸만 씌워지고 씌워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필터는 언젠가 바래진다.



단편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한 권의 책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읽고 여러 감정을 겪어낼 수 있어서 즐거웠다. 특히 그 안의 사랑, 찌질, 무기력이 기억에 남았다.

앞으로는 매년 사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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