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디엠을 실천한 한 인간의 이야기
뜨거운 가슴으로 지금을 살아라
많은 이들이 인생 도서로 뽑은 책이기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았다.
조르바라는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인상 깊다.
머릿속의 저울로 끊임없이 행동의 손익을 계산하지 말라.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
신과 악마는 같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동의할 수 없거나, 내용이 기대만큼 인상 깊지 못할지라도 최대한 장점을 찾아 학습한다. 그 어떤 사람도 시대적인 발상과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여성 작가가 이탈리아 소시지를 묘사할 때 굳이 네덜란드의 창녀의 엉덩이 같다고 비유한 것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 책의 다른 장점으로 이해하려고 애써 노력했다.
이 책에서 거듭 나오는 여성을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한 부분, 화냥년이라는 표현이 연거푸 나오는 부분을 애써 넘어가려고 했다. 그 시대에는 여성은 남성이 가진 재산 중 하나라는 것도, 남성과 평등한 지위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그냥 넘겨버리기엔 지나치게 자주 많이 표현된다.
조르바는 경멸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여자에게 뭘 기대한답니까? 한다는 게 고작 처음 만난 사내와 붙어 애를 낳는 거요. 사내에겐 또 뭘 기대합니까? 모두들 그 덫에 걸리는 거지요.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거요, 보스!”
“당연하지요. 보스, 당신은 여자가 특별한 줄 아는데……. 하긴, 특별하긴 하지. 여자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감정을 갖습니까? 여자는 알 수가 없어요.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그 시대의 여성상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머릿속으로 이해하지만, 나도 여성인지라 독서 중 불쑥불쑥 올라오는 거부감을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이 책에 좋은 교훈이 있을지라도 우리 시대에 좋은 책으로 꼽힐 순 없다. 적어도 나에겐 이 책은 나쁜 쪽으로 인상 깊다.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배울 점을 정리했다.
조르바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게 다 말썽인 거요. 죽어야 말썽이 사라지지. 산다는 건 말이오. 보스, 당신은 산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산다는 거요!” 그래도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조르바가 하는 말이 옳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나는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인을 만나는 일은 나 혼자 독백을 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나는 타락했다. 여자와의 사랑이냐, 책에 대한 사랑이냐 하는 질문에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했다.
우리는 바르게 살기 위해, 남들 눈에 번듯해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조르바는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때로는 마음속 악마가 시키는 대로 돈을 탕진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산다는 게 말썽이라. 인생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분명 조르바의 삶은 가벼웠을 것이다.
“보스, 보셨소?” “…….” “경사에서 돌멩이가 다시 생명을 얻었어요.” 나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쁘고 놀라웠다. 위대한 사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는 법이다. 모든 일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조르바에게 우주는 태초에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처럼 경이롭고 강력한 환상이었다. 별은 그의 머리 위로 미끄러지고 바다는 그의 이마 위에서 부서졌다. 그는 이성의 방해 따윈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조르바는 아침에 눈을 뜨면 마치 세상을 처음 본 아이처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바다와 하늘, 심지어 돌멩이까지도 그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경탄한다. 매일 매 순간을 감탄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배울만한 점이다.
나는 그저 언제나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내키는 대로 삽니다. 부딪쳐서 박살이 나면 뭐 어때요. 그래 봐야 손해날 게 뭐 있다고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 가느냐고요? 물론 갑니다. 하지만 기왕 갈 거 신명 나게 가자는 거지요.
어쩌면 우리는 인생을 너무 조심스럽게 살아갈 수도 있다.
흑역사를 만들지 말아야지. 아직 경험이 없는 일이니 조심해야지.
그러나 조르바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내키는 대로 전속력으로 행동한다.
부딪치면 뭐 어때. 기왕 하는 거 신명 나게 달려가자고.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이 필요한 법입니다. 나는 어제 일어났던 일 따위는 다시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도 미리 생각하지 않지요. 내게 중요한 건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조르바, 지금 이 순간 자네는 뭘 하나?’ ‘잠자고 있어.’ ‘그래,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자네 지금 뭐 하나?’ ‘여자한테 키스하고 있지.’ ‘그래, 그럼 실컷 해 보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 없으니 실컷 키스나 하게.’”
조르바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 정을 주었던 여인숙 주인이 죽고 나서 마음을 추스르고 보스에서 했던 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생각하지 않고, 새 일을 위해서 현재에 집중한다. 지나간 과거를 조작할 수 없고, 미래에 일어날 일도 알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일뿐이다.
인간의 머리란 게 가게 주인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을 해 대죠.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내주었으니 이익이 얼마고 손해가 얼마구나! 머리라는 게 이렇게 좀스러운 가게 주인인 거예요. 가진 걸 다 걸어 보려고는 않고 꼭 예비금이라는 걸 남겨 둡니다. 그러니 줄을 자를 수 있겠어요? 아니지요. 더 꼭 붙들어 맵니다. 만약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바보는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댑니다. 그러면 끝장이지요. 하지만 인간이 이 줄을 안 자르면 살맛이 나겠어요? 그거야말로 멀건 카밀레 차를 마시는 기분일 거요. 럼주 같은 맛이 아니라. 자르지 않고 인생의 맛을 보려는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매 순간 어떤 결정을 할 때,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내 머릿속의 저울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 저울질이 항상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이 저울 덕분에 합리적인 결정과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다만, 때로는 조르바처럼 머릿속 저울을 치우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인생을 너무 무겁게만 살지 말자고 생각했다. 덕분에 많이 가벼워졌다. 실용적이진 않아도 즐거운 일들도 해보려고 노력하고, 머리 아프게 생각하는 대신 그냥 내키는 대로 무언가 실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루하루 한 살을 더 먹을 시기가 다가오니 조금씩 다시 무거워지려고 한다. 조르바를 읽고 다시 가볍고 경쾌하게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