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 시절

그리움

by 최명숙


이번 겨울에는 눈이 자주 온다. 벌써 세 번째다. 이런 날은 혼자 있고 싶고, 음악을 들으며 추억에 잠기고 싶은데. 거기에 커피 한 잔이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날이다. 하지만 오래전에 한 약속이 있는지라 그럴 수 없다. 누구는 약속은 어기기 위해 있는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나는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이므로. 우산을 쓰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집 앞 정류장까지 갔을 때, 우산을 썼는데도 옷자락에 눈이 많이 붙어 있었다.


달리는 차창 밖을 쳐다본다. 유리창에 한 영상이 어른거린다. 앙금처럼 가라앉았던, 가만히 나만 혼자 꺼내보곤 하던, 그럴 때마다 조금씩 가슴이 설레던, 그런 영상이다. 다시 유리창을 본다. 아무것도 없다. 손을 대본다. 차가운 감촉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다. 그럼, 내 기억 속의 영상이 환상이었던 걸까. 분명히 유리창에 그때 장면이 어른댔는데. 아직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그날처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서울의 한 귀퉁이에 간신히 등 대고 살아가던 열아홉 살의 그때, 성탄절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캐럴이 울려 퍼지는 거리와 번쩍이는 트리, 구세군 냄비. 모두 내 시선을 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객지에서, 허기진 빈 속 같은 날을 희망으로 채우기 위해, 앞만 보고 뛰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래야만 하는 사명을 누가 부여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그건 장녀의식 말고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이 내렸다. 내가 고단한 몸을 뉘고 있는 종로 5가 이층 다다미방에서, 큰길 쪽으로 난 아주 작은 창문으로 눈 내리는 풍경이 보였다.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동대문이 눈을 맞고 있었다. 이대부속병원 올라가는 오르막길에도 눈이 쌓였다. 종로거리에 질주하던 차들이 하나둘 멈추고 온통 눈으로 덮였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외투를 입었다. 목도리를 하고 장갑까지 꼈다. 왜 그랬을까. 저 사람들 속으로 나도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갔다. 포장마차가 즐비하게 늘어선 보도에 사람들의 물결이 넘실댔다. 일 년 중 유일하게 통행금지가 없는 날, 크리스마스 이브였으니까. 걸었다. 눈은 펑펑 내리고 날씨는 포근했다. 종로 5가에서 낙원상가와 삼일빌딩까지. 무교동 낙지 골목에는 사람들이 가득가득했다. 포장마차에는 꼼장어가 익어가고.


혼자 걷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니, 자세히 안 봐서 모르겠다. 거리에 넘실대는 인파들을 보며 나는 조금 울었다. 외로웠고, 고향이 그리웠다. 도시의 척박한 땅은 내가 쉽게 뿌리를 내리게 두지 않았다. 고단했고, 허기에 허덕였으며, 배움에 목말랐다. 고향의 눈 오는 풍경이 생각나고, 잠자고 있는 가족들 틈에서 숨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싶었다. 자꾸 눈물이 흘렀고, 소리 내서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때만 해도 눈 올 때, 우산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날 거리에서 우산 쓴 사람을 거의 못 보았으니까. 더구나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가. 연인끼리 손잡거나 팔짱을 끼고 걸었다. 나도 역시 우산이 없었다. 눈을 맞는 낭만을 그 시절 사람들은 모두 가지고 있었을까. 털면 눈이 다 털리니까 번거롭게 우산을 들지 않았던 걸까.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장면이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사람이 없는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따끈한 국수 생각이 나서다. 한 푼이라도 아끼고 안 쓰고 살던 때라,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눈물 흘린 자국으로 얼굴은 더욱 차가웠고, 종로 5가에 있는 집까지 걷는 게 힘들 것 같았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들어가 보니 구석에 한 남자가 국수를 먹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난 무심하게 들어가 그의 옆에 거리를 좀 떼고 앉았다. 그래도 워낙 좁아 옆에 앉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국수가 나왔고, 한 젓가락 먹었다. 맛이 없었다. 조미료 냄새가 났고, 따끈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허기를 잠재우기 위해 먹어야 했다. 두 사람이 포장마차로 들어왔다. 나는 그의 옆으로 더 다가앉아야 했다. 그도 바짝 의자 끝으로 당겨 앉았다. 그의 오른손이 내 왼팔에 닿았다. 더 이상 국수를 먹을 수 없어 그만두고 일어났다. 그도 일어났다.


포장마차에서 나왔을 때, 눈은 멈춰 있었다. 그가 내 옆에서 걸었다. 종로 5가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상했다. 그도 나와 방향이 같은 줄 알았다. 자취집 골목으로 들어가려 할 때, 그가 말했다. 이 동네 사세요? 나는 쳐다보지 않고 답했다. 단음절로. 네. 그가 또 말했다. 아까 울었죠? 왜죠? 그제야 그를 슬쩍 보았다. 그는 눈처럼 깨끗하게 웃고 있었다. 약간 벌린 입 속으로 보이는 고른 잇속. 호감 가는 얼굴이었다. 아뇨. 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는 다음 주 일요일 낮 12시에 이 자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거기서 헤어졌다.


그날 나는 나가지 않았다, 당연히. 내 처지에 연애는 사치였으니까. 그 골목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얼굴도 정확하게 모른다. 그런데도 눈이 이렇게 내리는 날이면, 불연 듯 그의 웃음이 생각난다. 잇속 고른 그 입도.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 한 다섯 번 정도. 웃는 모습은 생각나는데, 왜 웃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얀 눈 속에서 본 웃음이어서 더 인상적이었던 걸까. 순수하고 무구한 눈처럼, 희고 맑은 청춘, 우리 그 시절.



버스가 멈추었을 때, 눈은 여전히 내렸다. 우산을 펼쳤다. 눈발이 아까보다 약해졌다. 카페 앞에 다다랐다. 유리창 너머 카페 안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눈 오는 날의 외출도 괜찮다. 이렇게 옛 생각에 젖어보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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