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안고 오늘을 연다

그날,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by 최명숙


꿈을 꾸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고, 시험을 치르고, 함께 어울려 농담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불과 6개월 전까지 예사로웠던 장면들이다. 꿈속에서 학생들은 나에게 어리광을 부렸고, 나는 징그럽게 리포트를 안 내는 윤 군을 야단치며 놀렸으며, 같이 깔깔 웃었다. 어느 여학생은 내 손을 잡으며 내 어깨에 기대기도 했다. 두어 명의 남학생은 큰 키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환하게 웃으며 시험 문제를 알려달라고 졸랐다.


꿈이 어쩌면 이리도 선명할까. 일상이던 그날들이 그리운 걸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더구나 신학기 아닌가. 어설프게 멋을 부린 새내기들이 교정에 넘실대고, 어색하고 긴장된 기운이 감도는 첫 강의가 시작되는 3월 첫주. 새내기를 연상하게 하는 노란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봄. 언제나 계속될 것 같았던 그날들이 끝나고 그리워하는 날이 되다니. 꿈에서 깨어났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건 그리움일 터다.


3월 신학기 첫주, 특히 새내기들이 앉아 있는 강의실은 긴장과 어색함이 버무려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처음 대학생이 되어 낯선 학교 환경에 적응해야 하기에 그럴까. 오리엔테이션 때 사귄 학우들이 간혹 있겠지만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 대부분 알지 못했다. 예전에는 모두 무거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데,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폰을 보았다. 내가 강의실로 들어가면 긴장된 모습으로 고개를 하나씩 들었다.


그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교탁 앞에 선다. 한 번 학생들을 주욱 둘러본 후, 입을 연다. 우리 학교에 입학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반갑다, 뭐 그런. 학생들의 긴장된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다음엔 내 소개를 한다. 이름을 칠판에 적고, 이름 참 소박하지 않느냐, 혹시 어머니 중에 내 이름과 같은 분도 계실 거다, 등등 더 헛소리를 해댄다. 빙그레 웃는 학생도 있다. 그 학생의 집안에 내 이름과 같은 식구가 분명히 있을 것 같다. 나도 이 학교 졸업생으로 여러분과 동문이다, 이를 테면 선배다, 선배 선생이 가장 무섭다는 것 아느냐, 등의 헛소리가 이어진다. 첫 수업은 그야말로 헛소리의 연속이다.


신학기가 되면 학생 이름을 결사적으로 외운다. 출석부에 첨부된 사진을 보며 외우고, 특이한 면이 있는 학생 이름을 먼저 외운다. 머리 염색을 했거나, 길거나, 모자를 늘 쓰거나, 안경을 썼거나, 맨 앞자리에 앉거나, 너무 조용하거나, 아무튼 뭔가 튀는 학생들의 이름이다. 도중에 사라지는 학생의 이름은 더 빨리 외웠다가 다음 수업에서 왜 도망갔는지 꼭 물어본다. 한 번만 그러면 다시는 재범을 저지르지 않는다.


새내기들 첫 수업시간에 내가 하곤 했던 당부의 말은 독서의 필요성이다. 주제는 ‘머릿속에 도서관을 지어라’다. 4층짜리 도서관에 가득 차 있는 책을 광인처럼 읽으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차곡차곡 머릿속에 책의 내용들을 쌓아두라는. 도서관 앞에서 나를 만나게 되면, 내가 꼭 커피나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과의 특성상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곁들였다. 꿈속에서 강의 내용도 독서의 필요성이었다.


몇십 년 동안 도서관에서 학생을 두 번 만난 적 있다. 도서관에 출입한 시각이 나와 달라서 그랬을 거다. 그 학생들과 아래층이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진달래꽃 수줍게 웃는 도서관 앞 오솔길을 거닐었으며, 새내기의 소감을 들었다. 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도 있었는데, 아프면 내게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으니 꼭 전화를 하라고 했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엄마처럼 이모처럼 편히 생각하라는 말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선생의 위치에서 근엄하게 있으면 될 것을, 갑자기 엄마나 이모처럼 생각하라니 무슨 식당도 아니고. 하여간 나도 한 오지랖 했다.


강의시간은 늘 즐거웠다. 많이 웃었다. 강의는 재밌게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안에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는 건 당연했고. 때론 심각하고 진지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 즐겁게 웃으며 강의했다. 그만큼 재밌었다.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신선했고. 문학과 글쓰기 등의 강의였기 때문에, 다른 과보다 바로 유대감 내지 동질감이 생겼던 것 같다. 꿈속에서도 학생들과 그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전주가 되면, 학생들이 내게 문제를 어떤 것으로 낼지 조심스레 묻곤 했다. 나는 문제를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강의한 내용을 중심으로 총정리를 해줬다. 그리고 가끔 강조하는 부분도 있었다. 눈치 빠른 학생은 알아챘을 것이다. 꿈에서도 학생들이 내게 시험문제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꿈속에서는 엉뚱한 소리를 하며, 학생들과 장난을 쳤다. 답안지를 나누어주다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학생들과 수다 떠는 장면은 벚꽃 동산이었다. 벚꽃 동산, 조금 있으면 그 동산에 벚꽃이 만발하고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봄을 만끽하리라. 그럴 즈음에 그곳에서 두어 번 야외수업을 한 적이 있다. 바람에 벚꽃 이파리가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벌들이 잉잉거렸다. 좋아하는 시, 또는 자작시를 그곳에서 읊었다. 아, 참으로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는 멋과 맛을 한껏 누리고 맛보던 날들. 시 낭송이 끝난 후, 우리는 그 동산에서 단체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하얀 꽃잎이 까만 짜장면 위에 살풋 내려앉던 그날. 꽃송이보다 더 환하게 웃음을 터뜨리던 나의 제자들. 꿈속에서는 그 벚꽃 동산의 나무에 기대 우리들은 무언지 모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시험지를 나누어주다 잠에서 깨어난 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제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광경들이다. 하도 평범하고 자연스러워 일상이던 날들, 그날들이 이제 추억이 되었다. 앞으로의 날들도 모두 지나가고 추억이 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가 소중한 것이리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인정하고,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아름다운 추억이 되도록 멋지게 엮어야 하는 게, 지금 내가 할 일이리라. 아침 해가 밝아온다. 그리움을 안고 오늘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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