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함께 먹고 싶은 것
언제부터 학교에서 옥수수빵을 배급했던가. 정확한 시점을 모르겠다.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모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어려운 집 아이들이 대상이었다. 반에서 삼분의 일 정도 되는. 나는 급식 빵 받을 대상이 아니었다. 도시락 못 갖고 간 날이 있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거기에 들지 못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집 아이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었다.
당시엔 집안이 어렵고 넉넉한 것을 입성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나는 옷을 깨끗하게 잘 입고 다니는 축에 속했다. 바느질 솜씨가 좋고 깔끔한 성격인 어머니는 우리들의 옷을 잘 지었고, 세탁도 잘해 입혔다. 산골에서는 아이들 옷에 신경 쓰는 집이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부분이 남달랐다. 외가가 살만한 집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 그랬을까. 품성이 그랬을까. 둘 다일 것 같다. 어머니는 어른들 옷 한 군데가 해지면, 멀쩡한 곳을 잘라 우리들 옷을 만들거나, 장에서 천을 끊어와 지어 입혔다. 거기다 늘 깨끗하게 손질해 입히니, 선생님에게는 살만한 집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급식 빵 받을 대상에 든 적이 없다.
옥수수빵을 배급하기 전에는 옥수수죽을 주었다. 구호 양식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십 년 남짓한 후였으니,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부족한 시절이다. 옥수수죽도 모든 어린이를 대상으로 배급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나는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먹어본 적은 있다. 짝꿍이 먹으면서 권해서. 고소하면서 약간 씹히는 식감이 있었다. 철없는 친구들은 옥수수죽 먹는 아이들을 더러 놀리기도 했다.
급식 대상인 아이들은 학교에 올 때 빈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 노랗고 네모난 국민 도시락. 누구나 똑같았다. 상급반 언니나 오빠들이 양동이에 노란 옥수수죽을 들고 와 빈 도시락에 퍼주었다. 가득 담지 않고 도시락에 반 정도 되게. 배급받은 아이들은 그 죽을 반찬도 없이 먹었다. 내 기억에 옥수수죽을 먹는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 있던 것 같다. 차별된 급식이 그런 마음을 갖도록 했던 것일까. 그럴 수 있다.
옥수수죽 다음에 나온 게 옥수수빵이다. 지금의 식빵처럼 아무런 고명이 얹히지 않고 팥소가 들지 않은 지극히 소박한 빵이었다. 그것도 처음엔 어려운 집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다가, 어느 때부터 모든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하지만 모두 다 줄 수 있는 정도의 분량이 아니어서, 분단별로 돌아가며 배급했다. 그러다 보니 항상 한 학급에서 반 정도만 받을 수 있었다. 모두 받는 날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빵을 먹는 날은 아이들 대부분이 도시락을 갖고 가지 않았다. 옥수수빵이 점심이었으니까.
담임선생님이 방과 후에 나에게 환경정리나 채점을 시키곤 하셨다. 늦게까지 남아 선생님을 도와 환경정리를 위해 게시판을 꾸몄다. 때로는 채점도 했고. 그런 날은 나눠 주고 남은 옥수수빵 한두 개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내게 주셨다. 집에 가지고 가서 먹으라고. 그러면 전혀 손대지 않고 갖고 와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는 동생들과 나에게 고루 나눠 주셨다. 먹고 싶었을 텐데, 한 귀퉁이도 안 떼어먹고 왔니, 하시며. 내게는 칭찬으로 들렸다.
학교에서 내가 늦게 오는 날이면, 동생들은 옥수수빵을 기다렸다. 특히 막냇동생은 옆집 상희네 바깥마당에서 소꿉놀이를 하다가도, 마을 어귀에 눈길을 두었는지, 나를 보고는 투스텝 걸음으로 얼마나 즐겁게 마중을 나왔는지 모른다. 그 귀여운 모습은 바래지지 않은 채 기억 속에 여전하다. 동생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내 헝겊가방을 흘깃거렸다. 내가 웃으면 방싯 따라 웃으고 내 손을 잡은 채 집으로 왔다.
환경정리나 채점을 한 날, 옥수수빵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빵을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 때문에 집에 갈 것이 걱정되었다. 동생들을 실망시킬 것 같아서. 신작로를 따라 터덜터덜 걷다가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막냇동생이 어김없이 투스텝으로 뛰면서 즐겁게 마중을 나왔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어떻게 동생을 봐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동생이 내 가방을 흘깃거릴 때는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아가, 오늘은 빵이 안 남았대. 그래서 선생님이 안 주셨어. 괜찮지? 내 말에 동생이 나를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는 물기가 도는 것처럼 보였다.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은, 풀 죽은 그 모습이 가슴 아팠다.
순서가 되어 옥수수빵을 받는 날,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동생 때문이었다. 그런 날은 점심을 굶었다. 간식거리가 변변찮았던 시절에, 그 빵은 신세계 같았다. 점심시간 때마다 학교 전체에 번지던 그 구수하고 맛있는 빵 냄새. 식욕을 자극해 더 허기지게 만들던 그 냄새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거였다. 그래도 동생에게 주기 위해 참고 집으로 가져갔다. 언니며 누나여서 그럴 수 있었을까. 동생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랬을까.
옥수수빵에 얽힌 이야기는 내 유년의 기억 한 토막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생들을 먼저 챙기던 마음, 그건 손윗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당연한 마음이었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 그랬다.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거나 손해 보는 게 하나도 억울하지 않았고, 그걸 보람으로 여기기까지 했으니까. 아랫사람들은 손윗사람의 그런 마음을 평생 잊지 않았고. 그게 당시 우리 사회의 대부분 각 가정을 지탱하는 근간이었는데, 이젠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어려운 시대가 아닌 데다 형제도 많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을뿐더러, 요구되지도 않는다. 형제가 재산이나 의무도 같이 나누고 짊어지는 시대 아닌가. 편리하고 합리적일 수 있겠으나 애틋한 우애는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만큼은 여전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게 요즘 세태다. 그래도 내 동생들은 다를 거라는 믿음을 나는 가지고 있다. 그게 착각일지 모르지만.
옥수수빵을 떠올리면, 아직도 즐겁게 뛰어오던 막냇동생의 투스텝 걸음이 눈에 선하다. 내 유년의 기억 한 토막, 그 귀엽기만 했던 모습. 이제 동생도 벌써 환갑 진갑이 다 지났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초등학교 일이 학년짜리 소녀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오늘은 옥수수빵, 그 노랗고 소박한 빵을 추억과 함께 먹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