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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l 25. 2023

왕관 쓴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하듯

영혼 없는 메시지

     

결혼을 축하합니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쪽 단톡방과 저쪽 단톡방에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똑같은 문장으로. 복사하여 붙여 넣기를 한 것 같다. 나는 왜 작은 것에 분개하는가. 어느 작가의 책 제목이다. 아, 이런 문장을 보는 게 힘들다. 나는 왜 작은 것에 못 견뎌하는가.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싶으니. 


우편함에 청첩장이 꽂히는 경우 이젠 드물다. 바쁜 세상이긴 하다. 우편으로 보내고 받는 것에 많은 시간과 경비가 필요하다. 휴대전화 모바일로 보내면 편리하다. 분실될 일 없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래, 그것까지 인정한다. 하지만 단체 카톡방에 올리는 건 마뜩잖다. 불특정다수를 초대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적어도 초청하는 개인에게 혼주가 직접 모바일이든 우편으로든 보내는 게 옳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면 어느 별에서 왔느냐고 물을 게 뻔하다. 시대착오적이라 할 수도 있고. 


부고는 좀 다르다. 결혼식엔 초대받아야 가는 게 마땅하지만 부음은 풍문에라도 듣고 갈만한 경우면 가는 게 맞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상을 당하면 경황이 없다. 그래서 상주가 단체의 장이나 총무에게 연락하면 단톡방에 올릴 수 있다. 그게 합리적이다. 가고 안 가는 문제는 각자 판단해서 행동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두세 명 인사로, 조의를 표하는 메시지를 남기면 나머지는 마음으로 동참하면 된다. 끝도 없이 올라오는 같은 문자, 문자들. 나만 불편하게 느끼는 걸까. 


아, 힘들다. 내가 못 견뎌하는 것은 아무런 생명력 없는, 아니 영혼 없는 문장, 문장들이다. 언어의 인플레이션. 경제뿐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인플레이션 현상이 끓어 넘치는 현실이다. 그것을 견뎌야 한다. 왕관 쓴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하듯, 현대를 사는 자들 그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견뎌야 하는 걸까. 그래야만 하는 걸까. 물론 일반화할 일은 아니다. 진정으로 결혼을 축하하는 사람이 있고, 명복을 비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학교 동창회 단톡방과 어느 문학 단체 단톡방에 올라오는 똑같은 문장들을 지운다. 두세 명 인사로 올리고 나면, 그만 올렸으면 싶지만 대놓고 말할 수 없다. 너무 예민하게, 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나는 두렵다.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나 튀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평범하고 별 존재감 없는 한 일원으로 보이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비겁한 처사인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은 참석하지 않을 게 뻔하다. 대개 함께 게시한 계좌번호로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보내거나 그냥 마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언젠가 동창생 민의 아들 결혼식에 갔을 때다. 고향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고작 세 명의 친구를 만났을 뿐이었다. 그중 둘은 민과 사촌과 육촌 간으로 친척이었다.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전과 다른 모습이다. 모든 게 계좌 때문이다. 간 때문이 아니고 계좌 때문. 


정오 뉴스가 나오고 있다. 빌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검거됐단다. 용의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용의자는 용의자일 뿐이다.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눌러썼다. 그런데도 고개를 숙였다. 피의자가 아닌데 왜 고개를 숙일까. 나는 그게 언제나 의문이었다. 그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아무런 검색 기록이 없었다고 했다. 문제는 휴대전화였다. 무수히 살인과 관련된 용어들을 검색한 흔적이 있단다. 


휴대전화는 한 개인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는 물품이 된 지 오래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있을 때 가장 먼저 관심의 중심에 놓이는 게 휴대전화다. 한시 반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게 그 물품이다. 어딜 가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 그러니 앞서 말한 휴대전화를 던져버릴 수도 없는 실정이다. 나 또한 금세 답답할 테니까. 모든 연락을 받고 취하며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들고 다니는 컴퓨터, 정보의 바다인데. 


카카오 톡을 지우면 된다고 누가 그랬다. 그랬다간 또 답답할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았다. 그때 황당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알림을 단톡이나 밴드를 통해 하는데, 나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했다. 그래서 가야 할 모임에 가지 못한 적 있고, 전체 휴강인 학교에 혼자만 갔던 적도 있다. 그런 일이 빈번해지고 전화기 수명도 다 되어 스마트폰으로 교체했다. 물론 편리하다. 처음엔 신세계로 온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중 단체 카톡방의 문자들이다. 결혼이나 부고는 그래도 양반이다. 어디서 퍼 나르는지 건강과 죽음에 대한 내용의 옮겨온 글이 문제다. 내용은 모두 대동소이하다. 가짜뉴스도 적지 않고, 잘못된 정보도 적지 않다. 물론 나는 읽지 않는다. 이 또한 양반이다. 가장 거슬리는 건 마음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문장들이다. 내가 예민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단체 카톡방의 많은 메시지를 지운다. 왕관 쓴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하듯, 현대인이 견뎌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단체 카톡방의 영혼 없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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