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달라는 그 말
“오늘 3시에 만나기로 한 거, 앞당기기로 했어요. 2시 30분까지 전철 OO역 2번 출구 앞으로 오세요. 교외로 나갈 거니까 선생님이 차 갖고 나오세요. 김 선생님과 약속이 그렇게 되었어요.”
유 선생의 전화는 약간 일방적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다가 갑자기 30분 앞당기는 게. 나는 앞의 일정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그래도 군말 없이 따르기로 했다. 더구나 내 차로 이동할 거라서 역까지 시간 맞추어 가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앞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부랴부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에 있는 책과 물품들을 트렁크로 옮겨 싣고, 앞뒤 의자 간의 거리도 적절하게 조정했다. 혹시 쓰레기라도 있나 살펴보았다. 자동차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다. 내게는 그렇다. 급할 때 먹는 간식거리와 물, 책 등이 늘 뒷좌석에 실려 있다. 갑자기 누군가가 동승하게 되면 그런 것들을 다 보이게 되는 게 나는 불편하다. 다시 살펴보고 운전석에 앉았다. 출발이다.
OO역에 도착하기 5분 전에 김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한 정거장 남았다고 했다. 유 선생님과 만나 같이 2번 출구 앞에 있겠단다. 거기서 만나자는 그녀의 말이 들뜬 듯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만에 셋이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만나자는 말을 전화할 때마다 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코로나 앓은 지 보름이 되었는데, 괜찮더니 3일 전부터 기침이 심하고 목이 아팠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에 병원에 가서 주사까지 맞은 터였다. 생각으로는 미루고 싶었지만 이번에 못 만나면 다시 또 시간 정하기 쉽지 않아 그대로 진행한 거였다.
전철역 출구에서 만나는 게 용이한 건 아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나오지 않으면 편리하지만 차를 이용할 때는 차 세울 데가 없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도 만날 장소가 마땅하지 않아 부득이 그곳을 선택할 수밖에. 그럴 경우 탈 사람이 미리 와서 기다려야 하는 건 당연하다. 차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도착한 시각은 정확하게 2시 30분. 출구 앞에 사람이 없었다. 약간 늦는 걸까 싶어 역을 다시 한 바퀴 돌았다. 또 보이지 않았다. 유 선생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는다. 김 선생에게 전화했다. 역시 받지 않는다. 다시 또 한 바퀴, 전화 걸기, 안 받음. 다시 또 한 바퀴, 전화 걸기, 안 받음. 무려 30분 동안 역 주위를 천천히 12바퀴나 돌면서 수시로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둘 다 전화가 안 되다니, 그리고 전화가 오지도 않다니.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그들은 무엇을 하느라 전화도 안 받고 안 하는 것인지.
약속 시간에서 15분 지날 때까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0분이 지나도록 전화까지 안 받으니 참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그러다 한 바퀴 더 돌고 32분이 지난 시각에 김 선생에게 전화를 한 번 더 했다. 받았다.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어디예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내서 물었다.
“어머! 미안해요. 지금 2번 출구로 갈게요.”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2번 출구 앞에서 두 사람이 차에 올랐다. 커다란 쇼핑백을 몇 개씩 들고 있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30분이 넘도록 그것도 전철역 앞에서 차가 어떻게 기다리라고. 무슨 일이에요? 약속 시간을 일방적으로 30분 앞당기더니, 30분 이상 늦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차를 세울 수도 없는 곳에서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요? 두 분 다 왜 전화를 안 받으신 거예요? 지금 참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어요. 몸도 안 좋은데, 이번에 못 만나면 또 언제 만날지 몰라 나왔더니. 제가 만나자고 했나요? 두 분이잖아요. 말이 안 나와서 더 이상 말 못 하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에요. 더 이상 말 안 해요.”
화가 치밀다 못해 열이 확확 났다.
버럭하고 나니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나 스스로의 약속이 무너져 더 화가 났다. 지난번 L 선생과 그 일이 있은 후, 스스로 약속했다. 웬만해서는 버럭 하지 말자고. 그런데 며칠 사이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으니. 사람들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기보다, 싫은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에 더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위주로 생각하니까.
“이유가 뭔가요?”
“지금 말 못 해요.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유구무언입니다.”
잘못했다고 하는 데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건에 대하여 나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로 차든 밥이든 어찌 마시고 먹는단 말인가. 화를 꾹 꾹 누르며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다.
“셋이 오랜만이죠? 점심은 드셨나요? 안 드셨다면 늦은 점심 겸 저녁으로 먹죠.”
그제야 두 사람은 좋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뭐에 홀린 것 같아요. 실은 이거 사느라 그랬어요.”
김 선생의 말인즉 전철역 2번 출구로 나온 시각은 약속 시간 2분 전이었단다. 둘이 같이. 저쪽에 보니 노점에서 옷을 팔고 있는데, 잠시 본다는 것이 그만 입어보고 사느라 시간이 그렇게 가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차가 숱하게 지나다니는 길가 옆이니 전화벨이 들리지도 않았고.
듣고 보니 더 어이가 없었다. 32분이나 그렇게 정신을 쏟았다는 게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가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이미 벌어진 일이고 다시 안 볼 사람들도 아니니.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더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그녀들에게도 더 이상 그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내가 버럭 하지 않고 교양 있게 대했어야 했을까. 아주 너그러운 자세로. 그런 상황에서 화내지 않는 게 교양일까. 내 언행에 후회되지는 않았다. 다시 안 볼 사람들이라면 화내지 않고 교양 있게 대한 후,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고 그들도 나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헤어질 때, 그 옷들을 잘 입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집에 도착해 다시 입어보니 별로라는 김 선생의 말에, 아직도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내게 미안해서 하는 말인지, 진정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 만나요. 두 번 다시 그런 짓 안 할 테니 오늘의 사건은 잊어주세요.”
“하하, 알았어요. 그럽시다.”
김 선생의 말에 나도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