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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Aug 10. 2023

불편해 보이는 시장 가방

운명공동체



저녁나절,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장본 시장 가방이 묵직했다. 불편한 오른쪽 손목 때문에 왼쪽으로만 들었다. 손가락이 저리면 바꿔 들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 길가에 놓인 의자에 잠시 놓았다 다시 들기를 두어 차례. 의자가 이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앉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듯 짐을 놓아둘 수 있다는 것이. 다른 때 같았으면 이쪽저쪽으로 옮겨 들면서 집으로 갔을 터이다. 불편해 봐야 소중한 것들도 보이는 걸까. 


다시 장 가방을 들었다. 나를 앞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셋이다. 남자 둘과 내 또래 여자 한 사람. 여자는 나보다 더 큰 시장 가방을 들었다. 묵직해 보였다. 한 손에는 손가방을 들고, 한 손에는 시장 가방을 든 여자, 몸이 호리호리했다. 여자는 장 가방을 들고 가다 어깨에 메었다 다시 들곤 했다. 무거워서이리라. 처음엔 예사로 보았는데, 차츰 거슬리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분명히 가족인 듯했다. 


왼편에 선 남자는 아들 같았다. 반바지 차림이었다. 단단한 종아리, 약간 그을린 피부,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휴대전화를 한 손에 들고 가끔 들여다보며 걸었다. 알맞게 살찐 목덜미와 팔, 걷는 모습으로 볼 때 건강상의 문제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검은색 셔츠와 베이지색 반바지, 스포츠 샌들 차림. 걸을 때마다 뒷머리가 나풀나풀 흔들렸다. 저녁놀은 붉게 타고 있는데, 내 속도 탔다. 


여자의 오른쪽 남자는 남편으로 보였다. 노인은 아니었다. 육십 대 후반 정도. 남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자유로운 두 팔을 흔들면서 유유자적 걷는다. 짧게 자른 머리, 남방셔츠, 긴 바지. 남자의 차림은 평범했다. 산책이나 운동 나온 차림은 아니었다. 여자가 손가방을 든 것으로 볼 때, 셋이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장을 본 것 같았다. 외식이라도 했던 걸까. 


여자는 다시 또 장 가방을 둘러메었다. 가느다란 여자의 어깨가 안쓰러워 보였다. 도대체 저 두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걷는 것일까. 분명히 가족이다. 가끔 셋이 무언가 말을 주고받으며 웃기도 한다. 건강한 두 남자 사이에서 호리호리한 저 여자는 또 왜 저러는 것일까. 무거운 장 가방을 낑낑대며 들었다 메었다 하면서.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건 나올 수 없는 그림이다. 나와서 안 되는 그림이다. 


여자는 왜 건강한 아들과 남편에게 장 가방을 맡기지 않는 것일까. 저 안에 무슨 보물이 들었기에. 들고 튈 만큼 거금이 들었을 리 없다. 보통 장 가방이니까. 답답했다. 저 안에 든 부식으로 아들과 남편을 위해 식탁을 차릴 여자. 무겁지 않을 정도의 가방이라면 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게다. 메었다 들었다 하면서 가는 뒷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인데, 어째서 저 아들과 남편에게는 보이지 않는지 답답했다. 간혹 말을 하는 것으로 볼 때, 가족이 분명하다. 그것도 아들과 남편 그리고 아내. 


혹시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래도 말이 안 된다. 건강한 남자 둘이서 힘들게 장 가방을 들고 가는 걸 보고만 있다는 것은. 속이 부글거렸다. 나는 왜 이다지 작은 것에, 더구나 남의 일에 분개하는 걸까. 나보다 훨씬 크고 무거워 보이는 장 가방을 든 여자의 뒷모습, 보기 싫었다. 무거운 장 가방 드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여자일까. 전근대적 사고를 가진. 노란 바탕에 와인색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 차림의 여자는 도회적으로 보일 정도인데. 


가사와 관련된 것은 모두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일까. 아니면, 집안 분위기가 그런 걸까.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집집마다 가풍은 다르니까. 일반화할 일은 아니잖은가. 나 같으면 절대 저렇게 하지 않았을 거다. 아들에게 들으라고 했을 거다. 아니 내가 말하기 전에 아들이 자발적으로 들었을 테고. 남편도 그렇다. 내 핸드백까지 들어주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인데, 장 가방 정도야 당연히 들었을 것이다. 


몇십 년 전에도 가족에게 가사를 분담시켰던 나다. 모두 바빴으니까. 나는 더욱이. 각자의 방을 청소했고, 거실은 같이 했다. 쓰레기처리는 남편이 전담이었고. 그랬던 우리 식구들이었으니 저 무거운 장 가방을 내가 들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자의 그 마음은 가상하다. 보는 것도 아까운 저 아들에게 장 가방을 내주고 싶었으랴,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여자의 마음은 그렇다 해도 두 남자는 뭐란 말인가. 항상 그렇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고 아내니까 당연하게 여겼던 걸까. 아니면, 벌이라도 주는 걸까. 아, 이해되지 않는다. 저 모습은 희생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족에 대해 예의가 없는 태도다. 


혼자 속을 부글대다 보니 아파트 정문이 보였다. 셋은 윗동 쪽으로 갔다. 여자가 손에 들었던 장 가방을 다시 어깨에 둘러메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서로에게 길들여졌을 뿐. 그러니 저리도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엔 거슬리는 장면이라도 해도. 그러니 남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슬리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희생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도 적절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족은 운명공동체이다. 아니, 운명공동체였다. 과거형으로 써야 한다. 내 심정적으로 또 의식적으로야 운명공동체가 맞다, 현재에도.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 가족 구성원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던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 개인의 삶이 중요한 시점에서 볼 때, 당연히 과거와 같은 무조건적인 어느 누구의 희생은 바람직하지 않다. 분명히 개선되어야 한다. 목격한 어느 장면 때문에 가족의 운명공동체 운운하는 것은 비약인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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