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와 이해
밤 11시쯤 퇴근한 아들이 말했다. “우리 ‘슬의생’ 볼까요?” 슬의생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약자다. 지난번에 시즌1을 재밌게 봤다고 했더니, 그럼 시즌2를 보자는 것이다. 내가 드라마를 좋아하기로서니, 오밤중에 저와 드라마 볼 군번인가. “너 착각하니? 난 네 여자 친구가 아니야. 엄마야, 엄마라구. 또 11시가 넘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여자 친구가 없고, 그냥 친구도 만날 수 없는 아들이 보자는데, 매정하고 야멸차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여자 친구가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친구까지 없는 건 아니다. 누구보다 친구가 많다. 자타 공인. 문제는 그 친구들이 대부분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미혼인 아들이 유부남이거나 유부녀인 친구를 만나기 어디 쉬운가. 아들은 작업실에서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온다. 어느 글에서 밝혔듯, 퇴근 1시간 전부터 보통 네다섯 번 내게 전화를 한다. 어디쯤 왔다고, 지금 걷고 있다고, 또는 밤하늘의 별이 예쁘다고. 참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마음은 알겠다. 어미를 걱정 끼치지 않게 하려는 걸. 아들이 퇴근 전화를 하기 시작하면 화장실에 가도 휴대전화를 들고 간다. 언제 전화가 올지 몰라서.
그런 아들이니 평소보다 일찍 온 날, 같이 드라마 보며 놀자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오해 마시길. 절대 마마보이 아님. 지극히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임. 워낙 시즌1을 재밌게 본 전적이 있는지라 기대되었다. ‘준완이’와 ‘익순이’가 사귀는 걸 ‘익준이’가 알게 되는 건 언제쯤일까. 알게 되면 익준이 준완에게 어떻게 할까. 등을 한 대 후려칠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코를 찡긋할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시니컬하면서도 속정 있는 ‘석형’에게 ‘민하’가 어떻게 대시해 나갈까, ‘송화’는 누구를 선택할까, ‘정원이’와 ‘장겨울’은. 또 내 모습이 많이 보이는 ‘로사’와 그의 남자사람 친구 ‘종수’는. 시즌2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결국 같이 보기로 했다. “그래, 좋아! 보자.” 아들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넷플**를 켰다. 아들인지 하숙생인지 하는 그는 의자에 앉고, 나는 그의 싱글 침대에 걸터앉았다. “차 한 잔씩 만들어 올까요?” 그가 의견을 물었다. “아니.” 저녁에 또 설거지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인심은 자기가 쓰고 처리는 내가 하는 격이잖은가. 꼭 마시고 싶으냐고 내가 물었다. 아니란다. 그럼 됐다.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시간을 보니 11시 30분이 넘어간다. 한 회만 봐도 새벽 1시 가까이 될 것 같다. 자정이 다 되어야 들어오는 아들의 시간관과 나는 다르다. 잠드는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 그러면 잠이 오지 않아 고생할지 모른다. 보고 싶은 드라마이긴 해도 오밤중에 보는 건 아니잖은가. 그래도 아들이 원하는 것이므로, 같이 시청하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잠이 밀려든다. 저녁나절 두 시간이나 맨발 걷기를 해서 그럴까. 드라마의 서사는 다른 회 같지 않게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그럴까. 눈이 자꾸 감겼다.
아들이 흘깃거리며 나를 자꾸 쳐다보았다. “졸리세요?” 물었다. “아니.” 눈꺼풀을 들어 올려도 자꾸 내려갔다. “저 로사 님과 엄마 많이 닮았어요. 김해숙 선생님 말이에요.” 아들은 나이 든 탤런트나 가수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그건 꽤 괜찮다. “응, 근데 내가 조금 더 예쁘지?” 졸린 눈을 가까스로 떴다. 아들이 대답하지 않고 흐흣 웃었다. 아니라는 의미다. “너 모르지? 나도 종수 씨 같은 친구 엄청 많아. 초등학교와 중학교 남자동창생들. 누구도 있고 누구도 있어, 너 이름 들어봤지?” 로사와 종수 씨 같은 나와 내 이성 친구들, 그 오밤중에 갑자기 그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드라마를 보았다. 새벽 1시까지. 잠 때를 놓쳐서 쉬 잠들지 못했다. 익준의 익살에 웃었고, 정원의 따뜻한 모습에서 인간애를 보면서. 또 그들의 밴드 연습에 나도 끼어서 악기 연주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무엇보다 로사와 종수의 우정이 편안하고 따뜻해 보였다. 아들에게 종수 씨 같은 내 남자동창생 몇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마흔두 살 아들과 새벽 2시까지 드라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 후.
아들과 동거한 지 이제 꼭 2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읽은 책 감상이나 뉴스 또는 다양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우리에겐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러다 의견 충돌이 일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봉합도 잘된다. 대개 아들이 꼬리를 내리는 편이다. 하숙비가 입금 안 돼서 그럴지도 모른다. 갑과 을의 관계가 모자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아, 그건 삿된 생각이다. 아들이 그만하면 착하기 때문이리라.
다음에는 영화를 함께 보기로 했다.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없는 동안에만 가능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와 놀아주는 것에, 아니 내가 놀아주는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함께 지낼 때는 최선을 다해 사이좋게 지내고, 상황이 바뀌면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흔두 살 아들과 동거, 장단점이 분명히 있으므로. 아무튼 우리는 현재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아닌 ‘슬기로운 동거생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