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네 엄마다

의견충돌

by 최명숙

세입자가, 아니 하숙생이, 아들은 아들인가 보다. 의견충돌이 났을 때다. 뭐 별것도 아니다. 가족끼리 늘 그렇잖은가. 대단한 일로 의견충돌이 나서 말다툼이 생기는 일은 적지 않은가 말이다. 아, 일반화하면 안 되겠다. 다른 집도 있을 테니까. 아무튼 나는 그랬다, 지금까지. 대단한 일이나 심각한 일은 보통 단독으로 처리할 때가 많고, 가족회의에 부칠 때도 있다. 하지만 의견충돌이나 말다툼은 대개 별 것 아닌 걸로 시작된다. 그날도 그랬다.


며칠 지난 일이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그럴까. 지금 그게 무슨 일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들이 내게 한 말이 중요하다. 둘이 옥신각신하다 마흔두 살 아들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아, 당혹스러웠다. 왜 지질하게 그 나이에 그 덩치에 운단 말인가. 울고 싶은 사람은 난데. 애들 앞에서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편이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그럴 것이다. 돌아앉아 울지언정, 몰래 울지언정.


아들은 워낙 울보다. 아, 유전인가. 중학교 때 내 별명이 ‘울숙이’ 아니었던가. 울보 유전자도 있단 말인가. 같이 살지 않으면서 잊었던 것인가. 아들은 어릴 적부터 그랬다. 텔레비전 보다가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줄줄 흘렸다. 흐느끼다 주체 못 하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 울었다. 말을 하다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 또 울었다. 과잉감정 발산자, 그래 그런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는 아들이다. 자기는 아티스트라서 감정에 충실하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과잉감정 발산자가 틀림없다.


“아, 쫌! 한두 살 어린애도 아니고, 왜 울어! 그쳐!” 소리쳤다. “눈물이 나오는데 어떻게 안 울어요.” 울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아들. 마흔두 살, 애아범이 돼도 됐을 나이에, 옛날 같으면 손자도 봤을 나이에, 이 무슨 성숙하지 못한 태도인가. “그래도 울지 마! 내가 울고 싶단 말이야!” 아들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이제 그날의 일이 생각났다. 아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그것에 대한 심정을 토로했다. 처음에는 호응해 줬다. 그래, 그랬구나. 너 힘들지. 조금만 더 참아봐. 인생이 뭐 그리 쉬운 게 아니야. 다 그런 강을 건너온 거야. 그런 정도였던 것 같다. 아들의 심정토로는 단계가 높아져 감정토로로 이어졌다. 나도 한계에 다다랐다.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런 정도도 못 견디니? 나이가 몇 개인데. 그만 얘기해. 네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라구. 나도 힘들어!” 그러자 아들이 울면서 말했다. “이런 말, 엄마한테 못하면 누구한테 한단 말이에요.”라고. 세입자이면서 하숙생이 내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들은 한참 흐느껴 울었다. 나도 눈물이 흘렀다. 세상 일이 어디 그리 녹록하던가. 십 년 동안 나가 살면서 억울한 것과 비합리적인 일을 당해도 견디며 살았는데, 집에 와 어미 슬하에 있다 보니 잊고 있던 자식본능이 살아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어리광. 참, 어울리지 않지만 그건 어리광일 것 같다. 그러니 나이를 먹어도 결혼을 안 하면 아이고, 결혼해도 자식을 낳지 않으면 아이라는 말이 있는 걸까. 덩치가 산만한 아들이 우니 더 속이 상했다.


안다. 아들은 작업만 하고 싶은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내게 월 삼십만 원의 하숙비는 못 낸다 해도, 작업실 사용료와 교통비, 통신비와 용돈, 거기다 비중이 큰 재료비를 어쩐단 말인가. 일주일에 한 번 나가는 수업으로는 기본적인 것도 해결이 되지 않는데, 순수하게 작업만 하고 싶어 하니, 부잣집에 태어나지 못한 아들 잘못인지, 부자가 아닌 내 잘못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저 연약해 보이는 아들을 이제라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먼저, 울음을 멈추게 해야 한다. 그 방법은 감정에 호소하면 안 된다. 세입자인지 아들인지 저 생명체에게 세게 나가야 하리라. “됐어! 그렇다고 내가 네 감정 쓰레기통이냐! 왜 모두 내게 쏟아 놓는 거야. 나도 힘들어!” 아, 나는 지금까지 배우고 익히고 닦아온 모든 것이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일에 여지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경험했다. 앞으로 더 큰일이 터진다면 어찌 감당하려고. 그런 게 없으란 보장은 없잖은가.


내가 싫어하는 어휘 중 하나가 ‘감정 쓰레기통’이다. 싫다. 그 어휘 자체가 싫다. 감정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냐. 문학하는 사람에게 그 감정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냐 말이다. 그것이 ‘쓰레기통’와 연관되니, 하찮고 더러우며 오물을 뒤집어쓴 것만큼이나 구역질 나지 않는가. 그런데 그 어휘를 입에 담다니, 나는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덜 된 인간이 아닌가 말이다. 아들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제 가능하지도 않은 일인데.


아들은 울었다. 나도 울었다. 한동안 각자 방으로 들어가 울었다. 시간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할 시간이었다. 거실로 나왔다. 내 발자국을 듣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아들이 자기 방에서 나왔다. 쭈뼛거리며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가엾다. 왜 생각이 없겠는가. 그만큼 마음이 힘들었던 건데, 위로가 되어주지 못하는 어미가 어미인가. “엄마, 죄송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아들이 다시 어깨를 들먹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텔레비전 볼륨을 높이는 것뿐이었다.


드라마가 시작되었고, 우리의 사건이나 감정과 아무런 상관없이 드라마의 서사는 진행되었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작별을 앞두고 애틋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울고 싶을 때 뺨 때린 격일까. 또 눈물이 흘렀다. “엄마, 우세요?” 아들이 물었다. “슬프잖아. 작별은 언제나 슬퍼.” 아들이 살짝 미소 지었다. 울다 웃는 저 아이. 저 나이가 돼도 이 늙어가는 어미 앞에선 아이일까. 어이없지만 어쩌랴. 다가가 아들을 안아주었다. “그래, 나는 네 엄마다. 엄마한테 무슨 말은 못 하겠니. 더 힘내.” 라며.


그 후 우리는 드라마를 끝까지 같이 보았다. 잠깐씩 드라마 평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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