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는 용기다
언젠가부터 깨달았다. 잔소리로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말이 왜 있는가. 마이동풍이라는 말도 왜 있는가 말이다. 수십 년 아들딸에게 잔소리를 했지만 내 입만 아플 뿐이고 화만 치밀 뿐이었다. 평생 가르치는 일만 하며 산 나인데, 잔소리를 오죽 잘하겠는가. 솔직히 남편이고, 아들딸이고, 국회의원들이고, 누구고 뭐고 할 것 없이, 세상 사람들 다 내 마음에 안 든다. 심지어 나를 낳고 길러주신 내일모레가 구순인 친정어머니도 마음에 안 들 때가 있다. 불효막심하게. 그렇다고 나 자신은 마음에 드는가, 그것도 아니다.
특히 아들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인물 그만하면 나쁘지 않지, IQ와 EQ 좋지, 거기다 재능까지 다양하게 낳아주었는데, 무슨 조화 속인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다. 아들은 비로소 자아정체성을 확립한 시기라는데, 개뿔. 내 판단으론 엇나가는 거다. 학사경고가 몇 번이던가. 전 과목 F인 성적표를 받은 적도 있으니, 속 뒤집히지 않고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아, 또 열불이 치민다. 나중에 들어보니 ‘개미눈물’만큼 이해 가는 부분이 있긴 하다. 참고로 이 ‘개미눈물’은 아들이 즐겨 쓰는 어휘다. 그래도 그렇지 어렵사리 마련해 준 등록금으로 공부하면서, 내 상식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뿐 아니다. 아, 다 나열하면 그나마 기대하고 있는 결혼도 물 건너갈까 봐 못하겠다. 혹시 지금의 멀끔한 모습을 보고 혹하는 순진무구한 처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처자의 더 순진한 어머니도 계실지 모르니까. 아들을 디스 하는 어미가 어미일까. 그렇다면 이미 나는 어미가 아니다. 인정한다. 하지만 웬만해야 말을 하지 않을 것 아닌가. 일거수일투족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 지금은 절대 아니다.
세상천지에 없을 것 같은, 내 마음에 쏙 드는 아들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아들이 언젠가부터 생각만 해도 울화 치미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짐승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과거에. 지금은 절대 아니다. 쉿! 이러다 혼삿길 막는 거 아닐까 몰라. 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대략 스물세 살 쯤부터. 지금 만으로 마흔두 살이니, 이십여 년 그런 가슴으로 아들을 봐왔다.
기도하고 마음 다스리기를 이십여 년. 사춘기 없이 크더니 사춘기가 길기도 하다고, 홍역 같은 거라고, 스스로 위무하기도 했다. 내가 죽으면 사리가 한 바가지 나올 거라는 말을 아들에게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전문가에게 상담 받을 각오까지 했었다. 아들을 생각만 해도 왜 울화가 치밀까요, 뭐가 문제인가요, 라며. 아들인지 하숙생인지 그 친구는 내가 그 정도였는지 모를 거다. 겉으론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으니까.
집에 들어온 시기가 그 방황인지 반항인지가 끝나는 시점이었을까. 아니면 이제 철이 좀 드는 걸까. 신기하게 지금은 대학 이전의 아들로 돌아간 것 같다. 곰살궂고 착하고 순종하는. 혹시 퇴행인가. 거기엔 계산이 아주 없진 않으리라. 어미와 불화해서 나가게 되면 그 많은 리스크를 어떻게 감당할까 싶어서일 수 있다. 아, 나는 아무래도 머리가 좋은 것 같다. 또, 그야말로 어미를 걱정하는 마음도 ‘개미눈물’만큼 있을지 모른다.
지금도 마음에 안 들어, 잔소리가 나오려고 할 때, 외친다. “너, 오늘부터 엄마라고 하지 마! 아줌마라고 해! 엄마라고 만 해봐 봐, 가만 안 둘 거야!”라고. 요즘엔 아들이 그 정도로 쫄지 않는다. 대뜸 받는다. “네, 엄마, 이제 엄마라고 안 할게요, 아줌마!” 징글징글. 내 소설에 나오는 진절머리 진철이 보다 더 진저리 나게 느물거린다. “뭐어, 아줌마!” 할머니라고 안 하는 게 어딘가 싶어 그만 웃고 만다.
따지고 보면, 아들을 바라보는 내 시각에 문제가 더 많았다. 남편의 말을 빌리면 완벽하지 못한 완벽주의자이면서, 예민하기가 한라산 넘어가게 생겼으니, 잔소리 대마왕이 될 수밖에 없다나 뭐라나. 사실 내 잔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이 그이다. 그렇다고 평생 개선된 것 하나 없었다. 결국 인심만 잃고 속만 상했으며 그 좋아하는 품위만 손상되었다. 기다려줘야 한다. 믿어야 한다. 잔소리가 아닌 조언이 되도록 현명하게 말했어야 한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걸 염두에 둔 적도 없다. 그저 내가 바라는 것에 미치지 않아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팔팔 뛰다가 제풀에 털썩 주저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내 시각을 바꾸기까지 나도 노력했다. 그러자 달라진 모습이 보였다. 불쑥불쑥 옛날의 나로 돌아가게 될 때, 잔소리하는 내가 되기도 한다. 그것도 없다면 어디 사람인가. 성인이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구습을 벗지 못하는 게 인간인가 보다. 노력 중이다. 어차피 한동안 함께 살아야 하니, 내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믿고 기다리는 게 제대로 된 어미노릇일지도 모른다. 밥만 잘해주고 몸 관리만 해준다고 좋은 어미가 아니다. 아, 그래도 언제까지 믿고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마흔두 살 아들인지 하숙생인지 잘 알 수 없는 친구와 살면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잔소리 안 하시나 봐요,라는 말이다. 안 한다. 아니, 조금 한다. 잔소리랄 것도 없는 잔소리 같지 않은 잔소리. 식탁 의자 앉고 나면 원위치시켜라. 퇴근하면 도시락 꼭 꺼내놓아라. 밥상 차려 놓으면 얼른 와서 먹어라. 뭐, 이런 정도다. 다른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잔소리해봤자 관계만 나빠지지 때문이다. 그걸 알고, 엄마의 잔소리 그 특권을 포기하기까지 사십 년 가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