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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an 29. 2024

편 가르기, 이제 그만!

편 가르기


어릴 적에 놀던 놀이에서 먼저 한 것은 편 가르기였다. 말뚝박기, 오자미 놀이, 줄넘기, 공기놀이, 사방치기 등의 놀이를 할 때 여럿이 모이면 편을 갈라야 했다. 우리 편, 상대 편. 단 둘이 할 경우엔 두 편으로 나누었고, 세 명이 할 때 한 사람은 깍두기였다. 깍두기는 월등이 잘하거나, 못하는 아이가 했다. 운동회 할 때도 청팀, 백팀으로 나누지 않았던가. 어릴 적부터 놀이에서 편 가르기는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그게 학습되어서 그럴까. 요즘 오나가나 편 가르기다. 직장에서나, 정치판에서나, 친구들 사이에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위일지 모른다. 손 맞고, 이념 맞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게. 적당하다면 누가 뭐랄 사람 없다. 과열되기 십상이어서 그게 문제다. 아기들에게 재밋거리로 물어보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건 이제 그만, 그만이다. 잔인한 편 가르기 질문이기 때문이다. 집안에도 엄마 편, 아빠 편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죄다 지들 엄마 편이지 내 편은 없다고 투덜대던 친구가 생각난다. 가족끼리 내 편 네 편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하면 유치한 일이다. 


요즘 우리는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싸우는 것을 흔히 보며 살고 있다. 특히 정치판에서. 물론 이념이 같은 사람들끼리 뭉친 집단이니까 그렇게 서로 잘 맞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진영논리에 빠져 무조건 반대, 무조건 찬성은 옳지 않다. 다른 정당이라 해도 잘하는 건 칭찬하고 같은 정당이어도 못하는 건 비난하고 고쳐야 한다. 그렇게 성숙한 정치현실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 결국 민생을 살피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있는 자리 아닌가. 국민들을 대표해서. 더 말하고 싶지 않다. 


한 친구가 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전화해서 날 비난했다. 이유는 어처구니없었다. 자기가 싫어하는 친구와 왜 가까이 지내냐는 거였다. 자기가 싫어하면 싫어하는 거지, 나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멀리할 이유가 없잖은가. 그게 서운했냐며 마음을 달랬다. 막무가내다. 싫단다. 그냥 그 친구와 만나지 말란다. 이거야 원! 나이를 이렇게 먹어서도 유아적인 사고를 한다는 게 어이없었다. 그 친구는 내게 누구 편인지 생각해 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생각했다. 그 친구가 나와 가까이 지내는 친구에게 맺힌 게 많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 했다. 그렇더라도 내게 강요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누구 편이 어디 있는가. 편 갈라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불편해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요즘 달라진 게 있다면, 전엔 참고 넘어갔던 일을, 지금은 짚고 넘어가는 거다. 사람들은 이상하다. 참으면 속이 깊어서 참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말에 꼼짝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그 친구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 시간이 없단다. 그냥 이야기하란다. 처음부터 다시 조곤조곤 말했다. 네 편 내 편은 맞지 않고, 나는 너와 더 가까운 게 맞는다고. 그건 사실이니까. 친구는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너와 더 친하다고 해서, 네가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지 말라는 건, 무리한 요구를 한 거라고 말했다. 내 사적인 영역인데 왈리왈율 하는 건 맞지 않다고. 월권이라고. 사람은 맞는 이야기 하면 기분 나쁜 모양이다. 결국 친구는, 말로 널 당할 사람이 어딨겠니? 샐쭉하게 말하고 전화를 먼저 뚝 끊었다. 


나는 더 기분이 상했다. 그래도 할 말을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와 한동안 관계가 소원해져도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친구라도 아닌 건 아니다. 덮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도 능사는 아니니까. 예전엔 그 친구에게 늘 져주곤 했다. 왜냐하면 친구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누구 편이냐고 묻는 말에, 내 성격이 나온 듯하다. 함께, 미래를 향해 갈 수 없는 걸까. 


편 가르기, 이제 그만! 외치고 싶다. 편의에 의해, 가르게 되는 일은 있더라도, 그것 역시 궁극에 함께 가는 것이어야 한다. 너 따로, 나 따로, 안 된다. 소아적 사고를 이제 그만두었으면 한다. 후손들에게 편 가르기 유산을 물려주어선 안 된다.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아야지, 나만 잘 살면 무슨 재민가 말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녀, 노소 등으로 편 가르기 하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직장이든, 정치든, 가정이든, 친구 간이든, 편 가르기는 옳지 않다. 


그냥 내 생각이다. 이런 말 의미 없다.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단지 실천하지 않을 뿐이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유익이 없어서 안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릴 적부터 편 갈라하는 놀이도 하지 않도록 해야 할까. 혼란스럽다. 사실, 편을 갈라 게임을 해야 전의에 불타는 의욕이 용솟음치지 않는가 말이다. 승리처럼 매력적인 건 또 없으니까. 다시 또 덮는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므로, 요즘 희귀해진 그 교양이라는 걸, 성숙이라는 걸 믿으며 기다려볼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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