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걷기

by 최명숙


숲 속은 약간 어두웠다. 아직 남아 있는 어둠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신갈나무 아래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땅을 디뎠다. 잊었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피톨이 발바닥을 타고 가슴으로, 팔로, 손끝으로, 머리까지 흐르는 것 같은. 아하, 오래전엔 자주 경험했던 것, 그걸 잊고 있었다. 가만가만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힘차게, 재빠르게, 오를 수 없다. 조심조심 발밑을 살피면서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대지에 맨발을 대본 게 얼마만인가.


맨발로 걷던 날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새로 사준 꽃고무신을 사흘 만에 잃어버렸다. 마지막 시간 전에 화장실 다녀온 후, 신발장 구석진 곳에 잘 놓아두었는데. 교실에 드나들 때마다 몇 번이고 돌아보았던 내 꽃고무신. 집에 가려고 보니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신발장 뒤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없었다. 청소당번을 하느라 늦은 게 원인이었을까. 유난히 내 꽃고무신을 쳐다보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옆 반 아이였다. 옆 반 신발장에 가보았다. 없었다. 꽃고무신이 닳을까 봐 사람이 보는 앞에선 신고, 안 보이면 벗어 들고 맨발로 걸으며 아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갈돌이 무수한 신작로에 꽃잎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발바닥이 아픈 것도 잊고, 속상한 마음에 자꾸 눈물이 났다. 어른들에게 꾸중 들을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까웠다. 국화꽃 무늬가 그려진 하늘색 꽃고무신이. 따끈한 자갈돌과 흙바닥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상한 마음을 위무해주는 듯했다. 저만치에 할머니가 헌 고무신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앞서 간 친구가 우리 집에 들러 말해준 모양이었다. 그만 울어라. 다음 장에 가서 다시 사주마. 흙바닥만큼 보드랍고 포근한 할머니 목소리에 봇물처럼 눈물이 터졌다.


솔가리가 덮인 폭신폭신한 산길을 지날 때,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제 어둠은 완전히 가셨다. 파란빛으로 바뀌고 있는 하늘 가장자리에 흰 구름 몇 점이 떠 있다. 가슴을 열고 산바람을 맞았다. 훅 끼쳐오는 솔 향. 까치와 박새의 지저귐. 숲 속은 고요한 이미지와 달리 소란스러웠다. 그건 거슬리지 않는 정도의 소란함이었다. 아, 생동감, 삶의 소리라고 해야 적확할 것 같다. 수없이 지났던 등산로인데 이제야 느끼다니. 천천히 온몸으로 걷다 보니 느끼는 것일까. 지난가을에 떨어져 산길을 덮고 있는 솔잎, 누렇게 퇴색한 솔잎이 내 발바닥을 가만히 만져주었다. 그 옛날 신작로의 흙바닥처럼.


숲 속에 들어오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세상의 번잡한 것들과 단절되고 만다. 그때서 들리는 게 자연의 소리들이다. 오색딱따구리가 신갈나무 몸통을 쪼고 있다. 공생하는 거라지. 나무는 벌레나 알을 내어주고 딱따구리는 나무를 살리고. 가만가만 걷는 내 발소리에도 꿩이 푸드득 날며 달아난다. 부스럭 후다닥! 아기 고라니 두 마리도 뛰어간다. 덜꿩나무 꽃이 하얗게 피고, 팥배나무와 때죽나무도 소담하게 피어나고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는 숲, 지저귀는 새들, 눈앞에서 알짱알짱하는 초파리들. 숲에는 숱한 생명이 살아가고 있다. 그 안에 들어온 나는 침입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가만가만 걷는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제 오르막길이다. 숨을 헐떡이며 넘던 고개였는데, 맨발로 걸으니 다르다. 숨 가쁘지 않다. 발바닥이 땅에 밀착되어 그런가. 오히려 오르막길이 재미로웠다. 신발에 몸을 의지하고 오르던 것과 달리. 오르막과 같은 어려움을 어떤 도움 없이 온몸으로 마주했을 때, 수월하게 넘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수없이 겪었던 어려움을 그렇게 넘어왔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지난한 삶의 문제를 맨몸으로 마주하고 살아온 사람이 어찌 나 하나뿐이랴.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으랴. 한 사람이 지나간다. 생면부지 늙수레한 남자에게 공연한 친밀감이 든다. 저 사람도 자기 앞의 삶을 그렇게 살아냈으리라는 생각에.


오르막보다 내리막길이 더 힘들었다. 자잘한 돌 부스러기와 나무의 잔뿌리들, 모래보다 약간 큰 돌 부스러기들은 몸을 움찔움찔하도록 발바닥을 찔러댔다. 소나무 잔뿌리 곳곳에 나와 있는 송진은 발바닥에 들러붙었다. 조심 또 조심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걷는다. 지금 내 삶이 그러하다. 인생 전체로 본다면 내리막길에 들어선 지 한참이다. 매사에 조심해야 호흡이 다하는 날 후회가 줄어들 텐데, 썩 그렇지 못했다는 자성의 소리가 폐부 깊은 곳으로부터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목적했던 곳까지 무사히 맨발로 걸었다. 도중에 갈등이 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성실함이 나의 무기이고, 마음먹은 건 꼭 하고 마는 내가 아니냐고. 마치고 나니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했다. 넘어질까, 다칠까, 긴장했기 때문이다. 맨발로 걷기의 효능은 신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더 있는 것 같았다. 삼사십 분, 삼천 걸음 정로 맨발로 걸었을 뿐인데, 생각은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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