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출석부 명단을 보니, 낯익은 이름 몇이 눈에 띄었다. 나와 함께 대학에 입학했던 동기들이었다. 조교로부터 언질이 있었다. 동기들도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그래도 설마 내 강의를 들으랴 싶었는데. 내가 그들보다 나이를 스무 살이나 더 먹었지만 동기는 동기다.
그들은 군대 전역하고 복학한 친구들이었다. 내가 졸업 후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동안, 그들은 나라와 국민을 지키느라 수고한 멋진 사나이들이었다. 함께 공부할 때 누나, 누나! 하며 격의 없이 지내던 대학 동기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선생과 학생으로 만나게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들이 스무 살 나이로, 나는 마흔 살 나이로 입학했었다.
함께 오티와 엠티를 갔고 체육대회에 참가했으며, 과제를 하기 위해 창작실에서 같이 공부했다. 그뿐인가, 수업 마치면 우리 과의 아지트에서 숱하게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때 젊고 반짝이는 동기들의 감성에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은 기혼자로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내게 또 다른 열등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서로 나이를 잊고 동기로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편히 지냈었다.
과사에서 출석부를 받아 들고 잠시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어쩌랴! 당면한 문제인데, 회피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과사무실 문을 열고 용감하게 또닥또닥 구두 소리를 내며 강의실을 향해 걸었다. 강의실 앞에 학생들 몇이 웅성대며 몰려 있었다. 동기들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순식간에 일렬로 반듯하게 서더니 갑자기 한 친구가 구령을 붙였다.
“차렷! 교수님께 경례!”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깜짝 놀랐다. 복도가 울릴 정도로 힘차게 인사를 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두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가슴이 벅차고 따뜻해졌다.
그들은 앞자리에 앉아 성실하게 수업을 들었다. 가끔 딴짓하는 후배들에게 눈짓과 표정으로 제재하면서. 선생보다 선배를 더 무서워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그것을 눈치챈 내 가슴에 든든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부담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좋은 분위기 속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렇게 학기 내내 재밌게 수업했다. 그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공부를 했던지 리포트 밀리는 적 없었고, 출석과 시험 등 나무랄 데 없이 강좌를 이수했다. 물론 성적도 좋게 받을 수밖에. 더할 수 없이 고마웠다. 그들은 멋졌다. 동기인데 선생이 되었다고 조금이라도 가볍게 보는 친구가 없었다. 평소에 불렀던 호칭을 잊어버린 듯, 깎듯이 교수님으로 호칭하는 게 어색할 정도였다. 가끔 동기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도 그들은 내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
한 학기가 끝났고 다음 학기에도 그들과 또 복학한 다른 동기들이 내 강의를 수강했다. 그때는 나도 자연스러워졌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 했다. 선생으로서의 대우보다 격의 없이 누나로 불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끼리 있으니까 그냥 누나라고 해.”
“에이! 어떻게 그래요? 한번 스승과 제자면 영원한 스승과 제자인데요.”
“무슨, 난 누나가 좋아. 여긴 사석이니까, 불러도 돼.”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거기에는 약간의 장난스러운 느낌도 있는 듯했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두 학기 정도 선생과 학생으로 지냈다.
그들과 헤어진 지 20년이 훨씬 지나 우리는 다시 만났다. 지난봄에. 모두 결혼했고, 아이가 있으며, 사회생활에 적당하게 관록이 붙은 모습이었다. 관록만큼이나 몸에 살도 붙었지만 사회생활에 지치지 않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도 그들은 아직 예전의 내 나이만큼밖에 되지 않는 젊은이들이었다.
“누나! 아니, 교수님! 잘 지내셨죠?”
“그때 저는 왜 성적을 그렇게 주셨어요? OO는 A였는데, 저는 C였거든요.”
“나는 F였는데, 뭘 그래?”
장난기 어린 그들의 말을 나는 듣고만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내 기억에는 모두 A를 휩쓸어간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때처럼 공부 열심히 한 적 없었어요. 누나가 강의를 하신다기에 우리도 긴장했죠, 뭐.”
“야! 누나가 뭐야! 교수님이지. 군기 빠져가지고.”
나를 놓고 그들은 얼렀다 뺨쳤다 신났다. 그들에게도 두고두고 추억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나도 그렇지만. 그제야 나도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자네들이 참 고마웠어. 새내기 선생이었잖아. 더구나 동기생, 부담스럽지. 그런데 나를 보자 군대처럼 일렬로 반듯하게 서서 인사하고, 수업 분위기 잡아주었잖아. 두고두고 고맙고 즐거운 추억이야. 지금에서야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네. 고맙다, 내 동기들 그리고 제자들! 멋져.”
내 말에 그들도 갑자기 숙연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는 내 손을 꼭 쥐어주었다. 졸업 후에도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관심 갖고 봤다며, 언제까지든 나를 응원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멋졌다. 참으로, 멋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