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절하라고 해서 두 번 절했다.
유난히 상쾌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헬스장 거울 앞에 섰다.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무게가 이상하리만치 성큼성큼 들어지던 그런 기분 좋은 날. 오후에는 흩날리는 벚꽃비가 떨어지기 전에, 한강 공원이라도 걷자고 약속한 터였다. 5kg만 더 들어볼까? 동그란 원판 하나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그때,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얘들아, 할머니 돌아가셨단다."
얼굴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손 쓸 새 없이 쪼그라드는 얼굴 근육을 도무지 컨트롤할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구겨진 윤곽을 타고 뚝뚝 흘렀다. 잘 됐어. 잘 됐어. 잘 된 거야. 눈물을 마음껏 쏟아내며 구태여 꺼낸 첫마디는 그거였다. 너무 잘 됐어. 더 이상 아파하지도, 외로워하지도 않고 이 생 너머 저 편의 무궁무진한 세계로 떠나간 거잖아. 감사해야지. 울 게 아니야. 그런데도 눈물은 개의치 않고 쭈룩쭈룩 흘렀다.
슬픔도 잠시. 멈출 줄 모를 것 같던 눈물은 헬스장을 벗어나자마자 쏙 들어갔다. 재채기라도 참는 듯 코 끝에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머금게 되는 순간이 때때로 있었지만, 눈동자는 금세 초점을 되찾았다. "회사에 장례물품 신청해야 하는데 장례식장 위치 나오면 알려주세요" 정신이 없을 외숙모에게 전화를 걸어 장례식장 주소도 물었다. 그리고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들었지" 했다. 서로 괜찮은 척하는 덤덤한 목소리에는 짠 물기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괜찮은 척 이어갔다. "회사 비품 신청해. 내가 받은 주소 보내줄게. 검은색 옷 있어? 내가 집 들릴 거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카톡으로 보내놔."
검은 옷이 어딨더라. 클렌징폼도 챙겨야 하나. 캐리어에 이것저것 챙기고 몇 달 전 선물 받은 종아리 마사지기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텀블러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무슨 여행이라도 떠나듯, 그렇게 무덤덤하게, 중간중간 울컥이듯 올라오는 감정을 집어삼키며 할머니가 있는, 할머니가 있는 원주로 출발했다. 할머니가 있는.
그래, 할머니는 그곳에 있었다. 정읍이든, 원주든, 어디든. 당장 가장 가까운 곁은 아니어도 멀지만 가까운 그곳에. 언제든 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아이고 하연이 소연이 왔냐'하고 반겨줄 것만 같은 그곳에 있어야 했다. 할머니가 있는 그곳으로 간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부재의 슬픔을 미처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주로 향하는 차 안. 뒷자리에 앉은 언니는 자꾸만 훌쩍였고, 나는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우는 모습을 오히려 신기해라 하기까지 했다. 처음 소식을 들은 직후 이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물론 결국 끝끝내 이렇게나 많이 울 줄은 그때는 몰랐지만.
백미러로 언니를 흘끗 흘끗 살피며, 나는 왜 눈물이 나지 않는가 그 이유를 생각했다. 할머니와의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으니 괜찮은 걸까? 할머니의 몸은 잠시 내 곁을 떠났지만, 할머니는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니까. 함께할 거니까. 그러면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눈물이 안 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슬픔을 나누지 않아서 눈물이 나는 거였다. 언니는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친구들에게 알렸다. 친구들이 멀리서 전해주는 도닥도닥 등 두드림 같은 따뜻한 위로에 언니는 눈물을 쏟아냈다. 할머니가 떠나갔음을 실감했고, 마음껏 슬퍼했고, 속 시원히 눈물 흘렸다. 나는 이 소식을 누구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어색해하다가 그냥 있었다. 그랬더니 눈물도 쏟아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떠난 지 며칠이 지난 지금, 건너 건너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들이 뒤늦은 안부 인사를 전해 오면, '소연아'라는 부름을 읽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진다. 그러니 슬픔은, 나눌 때 반이 되는 게 아니라, 나눌 때 비로소 슬픔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은 나눌 때 비로소 마음껏 슬퍼할 수 있고, 그렇게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날려 보내는 것이었나 보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슬픔은 그대로 묻힌다. 보듬을 수도 없이 그대로 묻힌다. 그대로 썩어 버릴지, 나름대로 소화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묻힌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2시간 여를 달려 원주에 도착했다. 장례식장에는 내가 다니는 회사가 보낸 화한이 나보다도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마침 내 회사, 언니 회사, 이렇게 두 개가 가장 먼저 도착해 입구에 나란히 서 있다. 눈물을 흘리다가도 정신을 차린 뿌듯함이 있었다. 언니와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이름이 걸린 두 화환이 멀뚱하게 서 있는 모습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할머니 할머니 하며 할머니를 쫓아다니던 우리 둘의 모습 같아서 눈물이 또 코 끝을 쿡 찔렀다. 그를 꾹 삼켜내며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데, 할머니를 모시던 큰외삼촌네 가족이 우리를 반겼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세라! 이게 몇 년 만이야! 우리는 마치 아주 약속이라도 하고 좋은 일로 만나기라도 했다는 듯 손을 꼭 맞붙잡았다. 너무 오랜만이다! 외삼촌, 외숙모를 보고도 나는 분명 웃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실 그 사진은 오는 길에 차에서 언니와 함께 심사숙고해 고른 사진이었다. 할머니가 영정사진으로 쓰려고 찍어 놓았다던, 촌스러운 한복이며 단호한 웃음이며 이게 뭐냐고 할머니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타박했던 그 사진은 끝내 쓰이지 못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소녀 같은 웃음으로, 보는 이마저 웃게 만드는 당신의 가장 당신 다운 순간이 담긴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쓰게 됐다. 할머니의 생일날, 정읍 초강의 할머니댁에서 찍었던, 할머니가 몸도 정신도 건강하셨을 때 찍은 가장 건강했던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보는데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할머니가 왜 여기에 있어. 할머니, 하연이 소연이 왔어요. 누구든지라도 손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할머니. 나 여기 왔다고. 할머니 듣고 있어?
정신이 없는 사이, 두 번 절하라고 해서 두 번 절했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 평소라면 딴생각하기 좋아하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두 번의 절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나는 두 번의 절을 하며 간절한 인사를 기도하듯 건넸다. 할머니, 사랑했어요. 할머니, 잘 가. 할머니, 보고 싶어. 쏟아내도 쏟아내도 끝이 없는 이 말들을, 딱 두 번 절하는 동안만 쏟아낼 수 있었으니 그것은 오히려 묘한 위로였다. 눈물이 여름날의 폭우처럼 쏟아졌다. 코와 입술은 또다시 빠르게 부어올랐다. 고개를 들어 서로의 퉁퉁 부어 빨개진 서로의 눈을 보며, 언니와 나는 또 웃었다. 10여 명의 내 또래 손녀손자들은 순식간에 웃음을 되찾았다.
"얘들아, 옷 갈아입어라." 매끈한 재질 때문에 정전기라도 튈 것 같은 검은색 개량한복을 외숙모가 건넸을 때, 우리는 금세 민망해졌다. 새까만 상복을 입으면 어두운 슬픔만이 가득 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우리는 상복을 입고도 꽤나 유쾌했고, 또 씩씩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며 활짝 웃었었고, 때론 배꼽을 잡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도 이렇게 웃어도 되는 건지 문득 의아해질 만큼.
정말, 우리의 장례식장은 이렇게 유쾌해도 되는 걸까?
49일 동안, 할머니를 보내는 글을 씁니다
다음 편 <장례식장, 그 참을 수 없던 유쾌함에 대하여>에서 계속됩니다